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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칼럼]《유리창을 닦으며》 캐내는 아련한 추억의 되새김질

이상호 | 입력 : 2023/03/16 [09:20]

▲ 이상호(전 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소소감리더십연구소 소장)     ©뉴스파고

 

봄이 오는 길목에서 겨울 시를 읽는다. 마치 한편의 동시를 읽는 느낌이다. 아이들에게 겨울은 동화 나라 같을 때가 많다. 그래서 겨울 시는 가끔 동시 같은 느낌이 든다. 겨울의 추위에 누구도 대항할 수 없으며, 겨울의 눈을 보고 낭만과 추억을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어른이 느끼는 겨울의 이미지가 그랬을 것이다. 어른의 겨울 이미지에도 성숙한 동화가 깃들어 있다.

 

 

햇살이 창가에

팽팽히 쌓이는

겨울 한 언저리

 

우리집

안방건넌방사랑방

유리창을 닦는다

 

유리창을 닦으며

문득

단짝 친구를 생각해 본다

 

몹시도

추운 겨울

학교 대청소 하는 날

 

호오 호오입김을 불어 가며

마주 보고

복도 유리창을 닦다가

우연히

유리창에 입맞춤을 해 버린

단짝 친구

 

수줍음에 그만

볼웃음을 하며

뒤돌아 서 버린 단짝 친구

 

지금도 나처럼

유리창을 보면

옛 친구가 생각날까

 

 

-양회성 유리창을 닦으며>-

 

 

“추억을 살리기 위해서 사람은 먼저 나이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 모른다(라이너 마리아 릴케/말테의 수기)” 나이 들면서 지난날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난날의 추억이 밤중에 차를 몰고 긴 서해대교를 지날 때의 가로등 불빛처럼 스쳐 간다. 생생하게 그리고 더욱 다정하고 슬픈 표정으로 스쳐 가는 추억은 지나온 삶을 반추하게도 한다. 그런 점에서 추억은 이별의 것이라도 아름다운 것이 된다. 지난 일을 반추할 수 있다는 것은 남은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가고자 하는 새로운 에너지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추억을 되새기고 삶을 반추하기는 활동이 적은 추운 겨울이 제격일 수 있다. 활동이 활발한 봄부터 가을까지는 그럴 여유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겨울에 추위를 핑계 대고 웅크리고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는 정말 지난날의 일들이 자주 떠오른다. 그래서 겨울은 신체활동이 줄어든 대신 삶의 내실을 다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적어도 나의 어린 시절, 이토록 문명화되기 이전의 겨울은 누구에게나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문명화된 지금은 그런 겨울을 문명이 앗아갔으니, 추억의 반추도 줄어든 것 같다. 어쩌면 그런 겨울을 점점 맛보기 힘드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문명은 인간을 사색의 세계에서 멀어지도록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학교 유리창이든 집안 유리창이든 닦아 본 일이 아득하다. 아파트에 살다 보니 유리창을 밖에서 닦을 일이 거의 없다. 틈나는 대로 닦는 아내 덕에 집안에서도 닦을 일이 거의 없다. 고작 내가 하는 일은 욕실 거울을 매일 닦는 일이다. 그것도 김이 서려 잘 보이지 않을 때이다. 확실하게 문명은 인간의 추억 활동을 줄여주었다. 그리고 새로운 영역의 활동을 선사하는 일도 많다. 그것도 참 다행이다. 그러나 문명이 선사하는 활동은 확실히 낭만적인 사색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시를 읽으며 유리창을 본다. 유리창 밖에서 다가오는 것은 아파트 건물과 나무 몇 그루 등등. 고즈넉한 풍경이나 재잘대는 아이들은 더더욱 없다. 어쩐지 쓸쓸하고 삭막하다. 고독이 밀려든다. 삶이 참 먼 길을 왔다.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 그때 우린 열심히 유리창을 닦았다. 신문지가 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신문지도 없었다. ‘선화지’라는 종이도 귀한 시절이었다. 우린 집에서 엄마가 만들어 준 벙어리 장갑 모양의 수건으로 유리창을 닦았다, 그것도 없으면 옷 소매로 닦았다. 그래도 때로는 킥킥거리며 앞쪽의 친구들과 ‘호호’ 불며 눈 맞춤도 하고 손짓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했다. 옆 친구와 누구의 입김이 센가 시합을 하기도 했다. 입김 서린 유리창에 글씨를 새기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다 지우기도 했다. 함께 유리창을 닦던 여학생도 떠오른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객지에 나온 지 오래되었으니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일흔이 되는 나이에 알기도 어렵고 알려고 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래도 동심으로 돌아가보고 싶다

 

그때 그 여자아이는 정말 사랑을 느꼈을까? 가끔은 발그레한 볼을 가지고 나를 대했다. 마치 “‘호오 호오’ 입김을 불어 가며/마주 보고/복도 유리창을 닦다가/우연히/유리창에 입맞춤을 해 버린/단짝 친구”처럼. 가끔은 짓궂은 놀림질도 했다. 그러다가 “수줍음에 그만/ 볼웃음을 하며/ 뒤돌아 서 버린 단짝 친구”가 되었다.

 

그때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짓궂은 장난도 많이 했다. 겨울에 눈이 잔뜩 내린 날이며 운동장에서 놀다가 여학생에게 눈 뭉치를 몰래 던지기도 하였고, 여학생들은 몰래 다가와 등짝에 눈 뭉치를 집어넣고 도망가기도 했다. 천진난만한 그 장난 어린 추억, 요즈음 아이들은 그렇게 할 리가 없다. 할 수도 없다. 잘못하면 학교폭력이 된다. 학교폭력은 있어서는 안 되지만 낭만마저 앗아가는 현실이 삭막하게 느껴진다. 세상이 각박해진 만큼 마음도 각박해지고 선함의 밭이 척박하게 되어 갔다. 모든 것은 이해관계로 따지며, 화해와 용서도 이해관계로 따지는 세상은 분명 문명의 사악함이다. 그런데 시를 통해 유년의 아름다운 추억을 되새김질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추억을 되새김질 할 수 있음은 참 다행이며 좋은 일이다. 원래 되새김질은 풀밭에서 열심히 뜯어 먹은 풀을 위에 일시적으로 저장했다가 다시 위에서 입으로 가져와 자근자근 씹어 넘기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 소화를 돕고, 영양을 풍부하게 한다. 소가 풀밭에서 풀을 뜯어 먹을 때나, 여물을 먹을 때는 일단 계속 먹기만 한다. 그리고 시간을 내어 계속 되새김질로 소화를 하여 자기의 영양분으로 만든다. 되새김질 되지 않는 음식은 소의 영양이 될 수 없다. 되새김질을 못 하는 소는 병이 난 소이다.

 

우리의 삶과 배움도 되새김질이 있어야 한다. 배울 때는 일단 열심히 배워야 한다. 배움은 지식을 일단 창고에 저장하는 일이다. 저장된 배움은 복습을 해야 한다. 복습할 때는 하나하나 꺼내어 소가 되새김질 하듯 잘근잘근 씹어야 한다. 그래야 내 몸속에 체화된다. 그런데 문명화된 지금의 배움은 그 복습이 적은 것 같다. 잘근잘근 씹으며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엄청난 지식을 주마간산처럼 스치며 지나가는 것 같다. 바쁘게 인터넷과 유튜버 등으로 접하며 내면의 성찰이 부족한 것 같다. 되새김질을 통한 반추와 성찰이 깃들지 않는 지식은 옷에 묻은 먼지와 같은 경우가 많다. 우린 지금 그런 문명의 시대를 살면서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끊임없이 타인의 문제, 그것도 좋은 일이 아니라 나쁜 일에만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우린 바쁜 일상을 정신없이 그리고 열심히 살아왔다. 특히 어른들은 남편으로, 아내로, 아버지로, 어머니로, 일터에서... 주어진 직무에 시달리며 삶의 책무를 다하느라 정신없었다. 그저 벽돌을 쌓듯 추억을 쌓기만 하면서 뒤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삶과 책무의 굴레에서 제대로 된 자기 되새김질조차 할 겨를이 없었다. 특히 시간으로 직조된 문명의 틀 안에서는 더욱 그렇다. 문명은 인간을 시간의 틀로 묶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여 적어도 시간의 느슨함이 주어질 때 소가 되새길질 하듯 삶을 되새김질 하는 여유도 필요하다. 그것을 잊어버리면 우린 병든 소처럼 된다.

 

이런 문명의 아침에 읽는 시 《유리창을 닦으며》는 아련한 추억을 캐내어 지나온 삶을 되새김질 하게 해 주었다. 그 친구도 “나처럼/유리창을 보면 /옛 친구가 생각날까”? 아니면 어떻겠는가? 이미 내가 그 친구와 추억들을 소환하며 추억을 되새김질 하므로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나를 이끌어 가고 있으며, 이미 늙음의 길목에 훌쩍 들어선 나이에 순수한 삶을 다짐해 볼 수 있으나 말이다. 모든 성찰에는 추억이 도사린 것 같다, 윤동주 시인도 <별 헤는 밤>에서 패(佩), 경(鏡), 옥(玉)을 소환하지 않았던가? 추억은 분명, 지금까지 나의 정체성을 이룬 하나하나의 벽돌임이 분명하다. 그 벽돌 하나하나에 의해 오늘의 내가 있다. 나이 들면서 흙속에 묻힌 그 벽돌 하나하나를 캐내어 살펴보며 지나온 삶을 반추하고 매일의 아름다운 마음을 되새김질하고 싶다. 벽돌 하나하나를 꺼내어 아름다운 집을 짓고 싶다. 그것은 성큼 다가오는 봄을 더 찬란하게 맞이하게 하는 영양분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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