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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가을 속으로 걸어가며》

이상호 | 입력 : 2023/09/08 [09:00]

이상호(전 천안아산경실련대표, 소소감리더십연구소소장)     ©뉴스파고

 

      《가을》

 

끝없이 나뭇잎이 떨어진다 

멀리서처럼 

넓은 하늘의 꽃밭이 시들은 듯 

거부하는 몸짓으로 

 

밤마다 무거운 지구가 떨어진다 

모든 별로부터 고독 속으로 

 

우리는 모두 떨어진다 

보라 이 손도 떨어진다 

눈길을 모아 주위를 보라 

모든 것에 낙하가 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꼭 바치는 이가 있다 

무한히 정다운 그 두 손으로 

 

-R.M. 릴케 《가을》 전문-

 

[이상호=전 천안아산경실련대표, 소소감리더십연구소장] 9월이다. 가을이 절망을 딛고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혹독했다.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무더위와 폭염 아래 인간은 신음했다. 긴 장마와 기록적인 집중 폭우로 산사태가 나고 터널이 물에 잠기고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고 삶의 터전을 잃었다. 폭염과 무더위, 장마와 폭우는 절망을 싣고 왔다. 그런데 그것도 9월이 되면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는 가을에 의해 잊혀 가는 것 같다. 그래서 인간 정신은 한편으로는 다행인 듯하면서 야속하다. 

 

지난 여름을 잊어서는 결코 안 된다. 여름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상처를 주었다. 상처를 준 만큼 성찰의 기회도 주었고 성찰도 강요했다. 인간은 문명 속에서 가장 문명인답게 살기를 원하지만, 문명의 발전을 이룩하며 문명의 또 다른 산물에 의해 기록적인 기후변화를 초래했다. 기후변화에 따라 나무들도 오래전부터 북쪽으로 피서를 떠나기를 재촉하고 있다. 대구의 사과나무는 이제 강원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있다. 문명의 혜택 속에 사는 사람들은 사과나무가 옛 삶의 터전을 버리고 북쪽으로 이사하는 이유를 성찰해야 한다. 그러나 그 성찰의 시도도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가을이 성큼 다가오니 그것을 이내 잊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가을을 즐긴다. 야속한 자기 망각이다. 

 

가을이 성큼 걸어오면서 불어오는 바람에 벌써 나뭇잎이 떨어진다. 조금 더 지나 10월이 되어 가을이 깊어지면 나뭇잎은 정말 맥없이 떨어져 한갓 추억 속으로 사라지리라. 그러면서 여름은 잊혀져 간다. 

 

이런 풍경을 상상해본다. 숲이 우거져 있다. 나뭇잎들은 붉고 노랗게 물들어가고 햇살은 그 옛날의 기운을 다 발휘하지 못한다. 그 아래 한 사람이 나무 사이를 걷는다. 그 사람의 발걸음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즐겁지도 않다. 다만 발걸음에 짙은 고독과 사색이 깃들어 있다.

  

걷는 사람의 발아래로 “끝없이 나뭇잎이 떨어진다. 멀리서처럼 넓은 하늘의 꽃밭이 시들은 듯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어지는 것은 절망이다. 그 떨어지는 것도 한때는 찬란한 하늘의 꽃밭을 이루었다. 그러기에 그 떨어짐을 “거부하는 몸짓”으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낸다. 모든 떨어지는 것들도 존재의 이유가 있다. 존재의 이유가 있기에 떨어지는 것들은 서럽고 아쉽다.

  

가을, 밤을 맞이한다. 밤은 무거운 지구를 눈앞에서 사라지게 한다. 지구는 해가 마치 서쪽 하늘 그 넓은 바다 속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 눈앞에 적막과 고독을 가져오고 만다. 하늘에 떠 있는 모든 별도 고독 속으로 떨어진다. 가을밤은 그토록 고독하다. 가을이 고독을 몰아온 것이다. 모든 것은 떨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떨어지는 것은 절망이다. 그러나 그 절망은 고독에 의해 다시 피어날 채비를 한다. 절망에 대한 성찰이며 그 성찰을 통해 모순을 극복한다. 모든 관계의 사이엔 별이 존재한다. 별은 나타남과 소멸됨을 반복한다. 창조와 멸망의 연속이다. 인생 또한 그렇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말 것이며 너무 고독에만 빠지지 말 일이다.

 

“우리는 모두 떨어진다/보라 이 손도 떨어진다/눈길을 모아 주위를 보라/모든 것에 낙하가 있다” 세상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있을까? 세상에 절망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떨어지는 절망을 통해 깊은 고독에 빠지지 않는 것이 있을까? 우린 다만 절망을 겪으면서도 그 고독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떨어짐을 통해 고독을 느낄 수 있음만이 존재로의 회귀를 향한 기도를 올릴 수 있다.

 

왜 그럴까? 모든 떨어지는 것 속에서도 “단 한 사람 꼭 바치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 바치는 이는 “무한히 정다운 그 두 손으로” 받쳐 준다. 구원의 길, 구도의 길, 승화의 길을 연다. 절망과 승화는 어쩌면 모순이다. 절망은 극복될 때 승화의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무한히 정다운 그 두 손” 그것은 무엇일까? 고독을 이겨내도록 받쳐 주는 절대자의 기도가 아닐까?

 

모든 존재하는 것은 절망과 극복의 증상을 두고 가슴앓이를 한다. 증상의 긍정적인 세계는 성찰과 기도를 통해 절망에 대한 극복 의지를 키우고 믿음의 길로 들어서는 천사의 길이다. 그러나 증상의 부정적인 세계는 성찰과 기도를 잊고 절망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망각의 길이며 지옥의 길이다. 모든 신은 절망의 고독에 빠진 모든 존재를 희망으로 이끄는 성찰과 기도의 세계로 이끌고 그것을 위해 두 손을 정답게 받쳐 준다. 그러기에 삶은 희망이 있고 사랑은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고독은 그것을 숙성시키는 항아리다. 

 

우리가 추구하는 무한한 상징계는 고독을 성찰하며 나아가는 존엄과 존경의 세계다. 거기엔 영혼이 아름답게 숨 쉬고 삶이 새롭게 태어난다. 가을은 그 길목에 선 우리의 안내자이다. 다만 깊은 성찰이 있을 때. 그 성찰을 위해 고독은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는데 성찰을 뒤로한 채 세상 속에서 아귀다툼을 일삼고 있다. 문명이란 삶의 이기에 빠져 자연의 변화인 가을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는 탓일 것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문명보다 위대한 교과서이며 삶의 경전이다. 그런데 문명 속에 사는 사람들은 아니 문명에 취한 사람들은 자연의 가르침을 잃어버리고 문명 속에서의 다툼을 연속한다. 문명은 인간에게 편의를 줄 뿐 인간을 참된 고독과 성찰의 세계로 이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일 접하는 뉴스는 사납다. 정치적으로는 끝없는 다툼의 소리만 들리고 정의를 추구한다는 단체들도 정치적 이기심이 가득한 것 같다. 하루가 멀다 하고 죽음의 소식이 들리고 축하의 꽃다발이 아닌 추모의 꽃다발이 거리를 채운다. 생명이 떨어지고 떨어진 생명의 자리에 정다운 두 손 모으는 기도보다는 투쟁의 소리가 들린다. 첨단 문명의 세계에서 인간 정신의 고갈이 가져다주는 절규인듯하다.

 

9월이 성큼성큼 걸어간다. 가을도 성큼성큼 걸어간다. 가을이 추석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즐거움보다 물가만 높아가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문명 속에서 도대체 자기 성찰은 보이지 않는다. 진정한 고독을 맛볼 기회를 갖지 못한 탓일 것이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모든 떨어지는 것의 참된 절망과 참된 고독과 참된 성찰을 경험하지 못한 탓일 것이다. 자연을 잃고 문명에 빠진 탓이리라.

 

하여 가을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지금, 모든 사람이 자연으로 고개를 돌리며 절망을 딛고 새로운 삶의 세계로의 진화를 위해 고독한 성찰의 기도를 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존재의 부활을 향한 극복 의지를 키우고 믿음의 길로 들어서는 천사의 길을 개척하기를 바란다. 《가을》 속으로 걸어가며 바라는 고독과 성찰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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