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곁으로 확 다가왔다. 불을 지피어 물을 펄펄 끓이는 듯하던 지난여름 그 더위도 자연의 순환 법칙에는 맥을 못 추는 것 같다. 하기야 그렇기에 사람과 동물 모든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우리 인간은 그 어느 생명체보다 면역력이 강하였던 것 같다. 어쨌든 그 혹독한 지난 여름도 거뜬하게 이겨냈다. 물론 참혹한 역경에 직면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면역력과 적응력이 있었기에 그 장구한 인간의 삶을 이어온 것 아닌가? 그리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제 곧 추석이 다가온다. 올 추석은 달이 세상을 아주 밝게 비춰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달빛을 받으며 걷고 즐기며 달을 향해 자신을 고백하고 소원을 빌 수 있기를 바란다. 시 하나를 읽는다. 고운기 시인의 《대숲》이다.
독일의 유명한 소설가요 사상가였던 괴테는 “정열은 고백에 의하여 고양(高揚)되며, 또한 고백에 의하여 진정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무엇을 고백하며 무엇을 숨겨 두느냐 하는 그 중용과 절도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고 하였다. 고백은 두렵지만 고백하고 나면 사랑의 가슴앓이도 열정도 진정을 맞이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어떤 죄의식도 진정을 경험한다. 이 시는 그런 고백에 관한 시다.
이런 상상을 해 보자.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다. 고향 집은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그런데 지금은 인적이 드문지라 한적하기 이를 데 없다. 사람의 발길이 뜸했던 지라 한동안 분주하게 집안을 청소하고 며칠간 묶을 채비를 갖춘다. 저녁에는 친구도 찾아올 것이다. 친구가 오면 어릴 적 해 묶은 이야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한가위의 시간은 시작될 것이다.
또 이런 상상을 해 보자. 오랜만에 친구와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내일의 희망을 다잡아보자고 추석 여행을 떠났다. 여행지는 사람들로 복잡한 도심이 아니라 한적한 시골이다. 암튼 전원이 살아있는 곳이랄까? 한옥 체험이거나 시골집 체험일 수도 있다. 여행지에 당도하여 짐을 풀고 며칠간 묶을 채비를 갖추었다.
어떻든 그렇게 한가위 휴가는 시작되었다. 일찌감치 저녁을 해 먹고 호젓한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전통가옥으로 이루어진 집의 창을 모두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집안으로 몰려왔다. 가을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지 않게 들린다. 기승을 부리던 모기도 사라졌다. 차 한잔을 마시기 위해 뒤로 난 창을 열고 친구와 밖으로 나갔다. 떠 오르는 한가위 달빛 아래로 서걱거리는 바람이 불어왔다.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이런 풍경, 이런 호젓함을 그 언제 경험한 적이 있는가?
향이 가득하게 피어오르는 커피와 대숲의 서걱거림, 소슬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절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서서히 한가위 달이 떠오른다. 정말 호젓하다. 이런 호젓한 시간을 그 언제 가져보았는가? 마음이 평온하고 순수해진다. 대화의 꽃을 피운다. 너무도 조용하고 진지한 삶의 향기가 커피 향처럼 묻어나는 대화가 오간다.
친구 중 하나가 속에 깊이 묻어둔 이야기를 꺼낸다. 사랑에 빠진(혹은 빠졌던) 이야기다. 그것은 그 친구가 비밀로 감춰 둔 것이었다. 그 이야기는 마치 성당에서 미사 때 하는 고해성사 같은 것이었다. 다른 친구는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고 있다. 묶은 사랑의 고백과 고백을 들어주는 자의 그 은은함과 진지함이 커피 향과 한가위 달빛에 어우러진다. 대숲과 바람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
위의 시는 위와 같은 설정을 하면 참 어울리는 시같이 느껴진다. 위의 시는 고운기 시인의 시집 『고비에서』에서 가져왔다. 사람은 누구나 묵은 사랑, 비밀스러운 사랑, 첫사랑, 혹은 몰래 찾아온 사랑 이야기를 깊이 간직하였다가 누군가에게 고백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고백이 누설되지나 않을까 걱정도 한다. 그래도 누구나 가슴 깊이 묻어둔 이야기를 고백하고 나면 후련해지고 무엇인가 진전되고 이루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친구에게 사랑을 탈탈 털어 고백한다. 그러면서 절대 비밀에 부쳐 달라고 거듭 당부한다.
친구는 그 사랑의 고백을 비밀에 부쳐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곧 친구의 고백이 위안이 되게 하는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의 고백에 대한 비밀을 지켜주기로 한 것은 한가위 달빛과 대숲을 지나는 서걱거리는 바람과 커피 향과 특히 대숲이 보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백을 들은 자의 발설은 금지되어 있다.
특히 고백의 비밀의 상징은 대숲이다. 대나무는 절개의 상징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선비들은 대나무를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여겼다. 선비들은 매란국죽(梅蘭菊竹)을 친구로 여겼다. 적어도 지조 있는 선비가 되려면 입이 무거워야 한다. 들은 것은 새길 줄 알고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대나무는 선비의 상징이자 지조의 상징이다.
그런 대숲 아래서, 그것도 한가위 달빛 아래서, 들은 고백이니 그것을 발설하여서는 안 된다. 이 시의 제목인 대숲은 그런 비밀을 지켜주는 지조와 언약의 상징이다. 그렇기에 사랑의 고백은 고백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게 된다. 대숲도 그래서 살아난다. 대숲의 서걱거림도 그래서 호젓함을 더한다.
우리 어디 가슴 깊이 간직해둔 사랑을 고백해 본 적이 있는가? 그런 사랑을 고백해 보지 못한 사람 또한 건조한 인생일 수 있다. 우리 어디 친구의 진한 사랑 고백을 들어준 적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믿음직하고 넉넉한 삶이었을 것이다. 고백은 믿음직하고 넉넉함이 없다면 절대로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혹시 한적한 시골, 대숲이 있는 전통가옥에서 머무를 기회가 있다면 달빛 비치는 대숲 아래 차 한잔을 들고 홀로라도 앉아 자신을 고백해 보면 어떨까? 듣는 자는 바람에 서걱거리며 화답하는 대숲일 것이다. 그 대숲은 나의 어떤 비밀도 지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적한 시골 대숲이 있는 전통가옥에서 머물기를 원하고 머물기를 권해본다. 거기 머물면서 나만의 비밀을 툭 던져보고 싶지 않은가?
세상 사람 누구나 가슴에 비밀 하나 숨겨 두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요즈음은 비밀을 지키기에 너무 힘든 세상이 되었다. SNS가 발달하면서 누군가의 비밀을 캐기 위하여 혈안이 된 사람들도 많다. 특히 유명인들일수록 더욱 그렇다. 자신의 비밀을 탐욕하는 자가 있음을 눈치챌 때 얼마나 불안하랴. 더구나 그 비밀이 세상의 정의로움에 위배 되지 않는 나만의 사랑 이야기라고 할 때 더욱 그럴 것이다. 그리고 나만의 비밀을 고백할 상대가 없음도 너무나 삭막한 삶이며 관계의 절망일 수 있다. 무척 답답할 것이다.
F. 라 로슈푸코가 “마음속에 있는 것을 고백하는 것은, 허영을 위해서, 지껄이고 싶어서, 남의 신뢰를 받기 위해서, 비밀을 교환하고 싶어서이다.(F. 라 로슈푸코/도덕적 반성)”라고 했듯이 인간은 누구나 고백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마음 깊은 곳에 진한 사연을 숨겨 두고 가슴앓이만 하면 병이 난다. 그래서 고백할 때 상당한 치유를 경험한다.
고백을 향한 욕망이 일 때, 가슴속에 숨겨 둔 비밀을 두고 가슴앓이할 때 이 시를 읽자. 그리고 대숲이 있는 한적한 시골로 여행을 떠나보자. 특히 한가위 달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추석, 달빛 아래 서걱거리는 대숲 바람 소리를 들으며 진한 커피 향을 맡으며, 홀로라도 대숲에 자신을 고백하여 보자. 지조 높은 대숲은 결코 그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그 가슴앓이가 치유될 것이니.
추석 한적한 시골, 대숲과 한가위 달과 서걱거리는 바람과 커피 향이 어우러지면 얼마나 낭만적일까? 그 앞에서의 고백 또한 얼마나 진지하고 우아할까? 불어오는 바람에 대숲의 서걱거림이 들려오는 것 같다. <저작권자 ⓒ 뉴스파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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