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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세상 읽기] 《동학사 은선폭포 가는 길》

동학사 은선 폭포 산행, 선밥에 맛있는 반찬 같았던 하루
이상호 | 입력 : 2024/10/14 [17:29]

▲ 이상호=소소감 갈등상담리더십연구소장, 전 천안월봉고등학교 교장     ©뉴스파고

 

[이상호=소소감 갈등상담리더십연구소장, 전 천안월봉고등학교 교장]

 

계곡을 끼고 오르던 그늘진 옛길 폐쇄하고

새로 난 동학사 은선폭포 가는 길

심장을 멈출듯한 가파른 계단

등을 따갑게 후벼파는 햇살

하늘을 이고 오르고 내리고

지루함과 아픔이 연속되었던

산.....길......

휴우우......

터질 듯 불어 제친 고무풍선 바람 빠지듯

한숨 토해내며 바라보는 은선폭포

졸졸 흘러내리는 가녀린 물길보다

따가운 햇빛 아래 세운 그 전망대 더 원망스러워

 

“이 길은 산행자를 위한 길이 아닙니다. 등산가만을 위한 길입니다.”

 

스쳐 지나가는 한 등산 전문가라는 사람의 그 한마디

가슴에 깊이 남아 맴돌아

 

“한 사람의 생각이 후대에 큰 영향을 주리라”

 

기획자와 시행자에겐 철학과 비전이 필요하고

그것은 역사를 일구는 길이고, 인간을 위한 배려이고

산행길은 등산가만을 위한 길이 아니고

그늘지고 새소리 들으며

하늘을 마시며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위안의 길이고 어울림의 길이어야 한다고

중얼거리던 그 독백

 

-이상호 《동학사 은선 폭포 가는 길》 전문-

 

평균적으로 8월 16일이면 더위가 한풀 꺾이는 시기다. 그러나 누구나 느끼는 것처럼 2024년 여름은 지겹도록 무더웠다. 좀처럼 더위가 물러가려 하지 않았다. 따가운 햇살과 뜨겁고 습한 열기는 인간의 참을성의 한계를 시험하듯 하였다. 사람들은 틈만 나면 계곡으로 그늘을 찾아 떠나지만 신통치 않았다. 그래도 몸과 마음의 건강과 힐링을 위해 더위를 이겨가며 하는 산행은, 힘들지만 젖은 몸을 씻고 난 후의 후련함과 몸의 탄력을 느낄 때는 행복감을 준다. 그래서 한여름 무더위에도 사람들은 산을 찾는 것 같다.

 

내가 모는 ‘홀격금’ 우리 4가족(*이 네 가족은 우리 부부를 포함한 지인 세 부부가 함께 산행하며 우정도 다지고 건강도 챙기기 위해 내가 주도하여 만든 모임이다. 그 이름은 홀 수 금요일 출발하자고 하여 ‘홀격금’이다.)을 실은 승합차는 8월 16일 10시경에 동학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날의 산행 목적지는 동학사 은선폭포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동학사 은선폭포를 오른 것은 무려 25년은 훨씬 전이었던 것 같았다. 첫 번째 대학 시절에 올랐던 것과 합치면 이번이 세 번째였다. 그러니 참 오래되었다. 길도 옛 등산길의 기억만 남아 있었다. 그래도 요즈음은 안내판도 잘해 놓았을 것이고 옛날보다 산행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기 때문에 잘 다듬어 놓아 오르기가 수월할 것이라 여겼다. 내 기억에 남은 동학사 은선폭포 가는 길은 계곡을 따라 오르는 숲속의 길이었다. 나는 그 무더운 여름에 함께 걷는 부인들에게 줄곧 나무 그늘 길일 것이라고 하면서 산행을 시작했다.

 

주차장에서 상점들을 지나 동학사까지 가는 길은 잘 다듬어져 있었다. 그곳은 주말이면 대전을 비롯한 인근 사람들이 자주 찾는 북적이는 곳이다. 나도 주차장부터 동학사 경내까지는 여러 번 가보았기에 그런 기분으로만 은선폭포 가는 길을 상상하고 모두 함께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을 전제로 하고 걷기 시작했다.

 

동학사를 지나 은선폭포 가는 길 입구까지는 무더위 속에서도 나의 예상이 맞아떨어져 나무 그늘과 정비된 테크길이 반겨 주었다. 그러나 은선폭포 가는 길의 입구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앞에서 말했지만, 옛날 계곡을 따라 그늘진 숲길을 오르는 은선폭포 가는 길의 추억에 빠져 있던 내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입구의 팻말에는 옛길은 폐쇄되고 새길이 나 있음을 안내하고 있었다. 새로 난 길은 옛길보다 300미터는 더 길었다. 300미터의 길이 평지 같으면 별것 아니지만 가파른 산길은 만만치 않은 길일 수 있었다.

 

초입부터 부인들은 뒤처지기 시작했다. 산행길은 시작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오르막이 시작되고 길이 험했다. 뒤따르는 부인들이 무척 원망할 것이라는 예측은 우리 남자 넷이 공통으로 느끼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부인들에게 따라 오르지 말고 내려가 동학사 경내나 나무 그늘 혹은 계곡에서 휴식할 것을 주문했다. 다행히 부인들은 그 말을 듣고 산행을 중단했다. 이제 남자들 넷은 어쨌거나 은선폭포까지 다녀와야 했다.

 

산행길은 오르고 오를수록 나무 계단과 돌계단의 연속이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헐떡거림이 연속되었다. 나무 그늘도 없는 능선으로 난 길이었다. 특히 인공 나무 계단은 완전히 햇빛에 노출되었다. 계단도 매우 가파르게 만들어 놓았다. “이 길 참 누가 설계하여 만든 것인지 등산을 제대로 시키려고 만든 것이구만. 여자들과 등산에 자신 없는 사람들은 아예 오르지 말라는 뜻이었구만. 아마 등산의 ‘등’자도 모르는 사람이 설계하여 만든 것일 거야. 요즈음 같으면 욕을 바가지로 먹을텐데...” 이구동성으로 투덜대었다. 그래도 쉬면서 숨을 헐떡이며 오르기를 반복했다. 얼굴에 줄줄 흐르는 땀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등과 머리를 강타하는 햇살이었다. 그날따라 바람은 어디 출장 갔는지 도무지 불어오지 않았다. 우린 그렇게 헐떡이며 산을 오르고 있었다.

 

삼분의 이쯤 올랐을까? 우리 일행 중 두 명은 먼저 오르고 나와 한 후배가 뒤 쳐져 오르고 있는데 젊은 남녀가 우리를 지나쳐 오르고 있었다. 그들도 힘이 드는지 수시로 쉬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인사 겸 말을 걸었다. 진주가 고향이라 했다. 20대 후반으로 향하는 청춘남녀였다. 짝이 잘 맞아 보였다. 연인인가 물었더니 결혼할 사이라 했다. 나는 박수를 살짝 쳐주면서 격려와 축하를 보냈다. 남자는 군대를 갔다 와서 복학했단다. 우리들의 말도 잘 받아주고 장단도 맞추어 주었다. 나는 앞으로 잘 살 것이라고 하면서 아이는 몇을 낳을 것인가고 물었더니 여자가 “둘은 낳아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반문하듯 답했다. 나는 엄지척을 하면서 “애국자”라고 추겨주었다. 그들은 우리와 거의 비슷한 속도로 산을 올랐다. 참 고운 심성의 청춘남녀란 생각이 들었다. 그 남녀는 산행에 지친 우리에게 활력을 주었다.

 

은선폭포는 오름길 끝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꼭대기 가까운 곳까지 갔다가 다시 계단을 통해 한참을 내려가야 했다. 내려가는 길 뒤에서 누군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또 무슨 액티비티인가” 낯선 사람의 목소리였다. 우리보다는 10년 아니 그보다 아래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등산에 상당한 경지에 오른 듯한 매무새였다. “안녕하세요. 오느라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길이 좀 힘들지요?” 나는 그에게도 말을 걸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등산을 자주하는 사람입니다. 전국의 산을 다니는데 이런 길은 등산가만을 위한 길입니다. 요즈음은 등산가들도 이런 길은 피합니다.” 그 말이 뇌리에 깊이 박혔다.

 

그렇다. 분명 동학사 은선폭포 가는 길은 등산가만을 위한 길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 없는 사람은 오르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고행을 이겨내듯 오르라는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은선 폭포는 아무나 구경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었을 테지. 한 사람의 비좁은 생각이 역사의 물결을 비좁게 한다. 정치도 마찬가지고 다름 모든 일도 마찬가지지. 그래서 의사결정권자의 철학과 인간관과 미덕이 중요한 것이지. 요즈음 같으면 누구나 오르라고 가급적 계단도 줄이고 무장애 길을 만드는 추세인데 앞을 못 내다본 거야. 이런 야유성 발언이 입속을 맴돌았다. 그러면서 누군가 은선폭포 가는 길을 무장애 길로 다시 기획하여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길로 만들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보았다.

 

드디어 은선폭포가 바라보이는 전망대에 도착했다. 그곳도 햇살에 완전 노출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바람은 출장 간 모양이었다. 나뭇가지 일부가 가려 은선 폭포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멀지는 않지만 조금 멀리 바라보이는 은선 폭포는 폭포수라 하기에는 부끄러운 가녀린 물줄기였다. 하기야 이 가뭄에 저런 물줄기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도 모르게 실망이 엄습해 왔다. 저걸 보려고 이 고행을 했던가?

 

전망대 따가운 햇살 아래는 일곱 명이 은선 폭포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우리 일행 4명, 진주에서 왔다는 그 청춘남녀, 그리고 등산가를 자청하는 사나이. 그런데 그 등산가는 이내 하산 하려는지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그 청춘 남녀는 우리 곁에서 한참을 있었다. 그때 나와 같이 늦게 오른 후배가 장난기를 발동하며 먼저 올라온 두 일행에게 퀴즈를 내었다. “저 두 남녀는 어디서 왔을까요?” 그런데 산을 오르는 중간에 만나 우리와 나눈 대화를 숨기고 아가씨가 능청스럽게도 맞장구를 쳤다. “글쎄요 우리가 어디서 왔을까요?” 영문을 모르는 두 사람은 출신지를 맞추기 위해 궁리하고 있었다. 후배는 그 남녀의 관상을 보고 맞출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남녀는 또 능청스럽게 앞에서 얼굴을 보여주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그 후배는 “아, 이 두 사람은 경남하고도 진주에서 온 것 같군요.” 그런 점쟁이 같은 장난기의 대화가 한동안 먼저 오른 두 일행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런데 더 멋졌던 것은 우리들의 그 장난기에 장단을 맞추어 준 그 젊은 남녀의 유연한 태도였다. 젊은이의 그런 유연하고 친근한 태도가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었고 오름길에 느꼈던 힘듦과 유감을 모조리 풀어주는 듯했다. 산행은 산행에서만 즐거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풍겨오는 향기가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젊은 남녀는 그런 향기를 우리에게 불어주었다.

 

하산 길은 바쁘고 조심스러웠다. 아래에서 기다릴 부인들 때문에 마음과 발길이 바빴고 계단과 경사가 심해 조심스러웠다. 우린 가끔 무릎에 충격을 주는 걸음이지만 서둘러 하산했다. 그리고 부인들을 만나 예약해 놓은 식당으로 갔다. 약간 늦은 점심은 시장기 탓인지 음식의 맛 탓인지 맛있게 먹었다. 곁에는 동학사 계곡이 흐르고 그곳은 물놀이를 허용한 곳이었다. 점심을 먹으면서 우린 계곡에서 발을 담그고 두 시간쯤 쉬었다가 집으로 가기로 했다.

 

계곡의 좋은 자리는 이미 먼저 온 사람들이 점유하고 있었다. 대부분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엄마들이었다. 우리도 물가 적당한 장소에 식당에서 제공한 돗자리를 깔고 양말을 벗고 발을 담그고 물속으로 걸어 다니기도 했다. 물은 시원했다. 어린아이처럼 돌을 가져다 돌탑 쌓기 시합도 하고 돌탑 옮기기 시합도 했다. 모두 환갑을 넘기고 칠순을 향하는 나이에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우린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면서 휴식하는 동안 은선폭포 가는 길이 언제 힘들었는지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여행에서는 항상 힘듦과 즐거움이 교차한다. 계곡에서 나왔을 때는 오후 4시쯤 되었는데 지치도록 힘든 무더위는 여전했다. 8월 중순의 날씨치고는 여전히 야속한 날씨였다. 오후 4시 30분경 우리는 차를 몰고 집으로 내달렸다. 차 안에서 모두 즐거워했다. 은선폭포 가는 길의 유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고 계곡에서의 즐거움을 이야기했다. 밥보다 반찬이 더 좋았다. 그러면 어떠하랴. 몸과 마음이 즐거운 하루였으면 되었지. 생각해 보니 동학사 계곡에서의 물놀이는 우리에게 은선 폭포 가는 길의 그 유감을 씻어내는 데 충분했다. 등산보다 물놀이가 더 좋은 하루였다.

 

식당에 가면 밥보다 반찬이 좋아 밥을 더 맛있게 먹는 경우가 많다. 동학사 은선 폭포 가는 길은 고행의 길처럼 힘들고 유감스런 길이었지만, 산행길에서 만난 그 청춘남녀와 동학사 계곡의 물놀이는 선밥에 맛있는 반찬처럼 하루를 즐거움으로 바꾸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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