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로 세상 읽기]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무와 숲에게 배워야 합니다.

이상호 | 입력 : 2019/09/08 [16:02]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가을이 성큼 다가온 느낌입니다. 시원한 바람이 불더니 하늘이 시리도록 맑은 날이 늘었습니다. 근데 가을장마와 큰 태풍이 온다네요. 비는 조금 내렸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할 것 같습니다. 결실을 기다리는 농작물이 해를 당할까 두렵네요. 올여름은 더위와 높은 습도에 지친 날이 많았지만, 작년보다 에어컨을 덜 틀었고, 더위에도 덜 시달렸던 것 같습니다.

    

나는 딸과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라인만 달리하고 삽니다. 매일 아침 외손주 유치원 보내는 일을 도와주려 딸의 집에 다녀온 아내는 딸의 집은 우리 집보다 더 덥다고 합니다. 이유는 나무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집은 2층인데 앞으로 4㎡ 뒤로 3㎡쯤 나무가 우거져 베란다까지 올라와 있습니다. 나무 밖에도 보도블록입니다. 딸의 집은 12층이라 전망이 훤한데도 동남향의 창으로 강한 열기가 들어왔습니다. 우리 집은 베란다 창을 열면 가끔 부는 바람에 나무의 사각거림이 집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바람은 딸의 집보다는 시원했습니다. 나무의 힘이었습니다. 앞뒤의 나무들이 열기를 차단하고 바람과 함께 나무의 사각거림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나무와 바람의 고마움을 실감나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나무에 관한 시를 읽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 서정홍(1958~  )

    

종교가 없어요, 저는

그러니까

수십억짜리 시멘트 건물 안에서

냉방기 난방기 팍팍 틀어놓고

기도 같은 거 안해요

생각만 해도 그 꼴이 참 우습잖아요

지구온난화로 생태계가 참 엉망인데요

그런데 치사하게 네편 내편 가르지도 않아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저는 아무데도 물들지 않은

청정淸淨구역 안에서 산다니까요

    

  -서정홍의 『쉬엄쉬엄 가도 괜찮아요』(단비)에서 -

    

서정홍(1958~  )은 경남 마산 출생으로 1990년 마창노련문학상과 1992년 제4회 전태일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산 좋고 물 좋은 합천에 사는 농부 시인입니다. 그의 시에는 농촌과 산, 나무와 숲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소박하면서도 투명합니다.

    

시인은 작품 노트에서 《한마디로 말하자면》을 쓴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날 낮에 부모와 함께 찾아온 고등학교 1학년 학생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학생이 물었다. ‘농부 시인님은 종교가 있나요?’ ‘그건 왜 묻지?’ ‘저도 농부 시인처럼 산골에 살아요. 그래서 가까운 곳에 절도 없고 예배당도 성당도 없어요. 종교가 없어서 참 다행이에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나?’ ‘저는 어려서 그런지 몰라도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한테 어떤 가르침을 받는지 궁금해요. 종교인들 사는 모습을 보면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와요’ ‘어떤 모습을 보았기에?’ 그 학생이 시원하게 대답한 말이 그대로 시가 되었다”

    

시는 나무를 의인화했습니다. 의인화된 나무는 숲에 삽니다. 종교도 없고 크게 바라는 것도 없습니다. 수십억짜리 시멘트 건물 안에서 냉방기 난방기 팍팍 틀어놓고 기도 같은 것은 더욱 안 합니다. 인간은 참 이상합니다. 바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 안에서 기도를 합니다. 콘크리트와 냉방기 난방기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며 열기를 뿜어 지구를 더욱 뜨겁게 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됩니다. 그리고 더운데 전기요금을 너무 받는다고 난리를 칩니다. 사실 지구온난화의 주범은 나무와 숲 등 녹지를 파괴하고 거대하게 세운 도시의 콘크리트와 아스콘, 인간이 편리하기 위해 만든 온갖 문명의 이기들이 내뿜는 열기들이 저지른 재앙이기도 하지요.

    

더 치사한 것은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고 기도하며 다짐하는 종교인도 네 편 내 편을 가르며 편싸움을 치열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에서는 종교가 편을 갈라 싸우는 모습만 말하지만, 세상이 온통 편싸움이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말한 것이라 여깁니다. 나무는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저는 아무데도 물들지 않은 청정淸淨구역 안에서 산다니까요” 그것은 현실에 대한 항의만 아니라 오염되지 않은 환경, 네 편 내 편 없이, 서로 어울려 투덕투덕 의지하고 도우며 살고자 하는, 소박하고도 강렬한 우리들의 소망이겠지요.

    

시를 읽으며 두 가지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그 하나는 인간의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문명이란 이름으로 지구에 저지른 재앙과 미래 문명의 가능성입니다. 문명은 신도시 개발이라는 거대한 도시화의 길을 걸었고, 도시화는 어쩔 수 없는 문명의 한 축이라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토지주택공사가 택지 정리를 하여 만들어내는 신도시를 보면 ‘과연 이래도 되는지?’ 하는 의문이 강합니다.

    

신도시 정책은 1980년대 중후반부터 3저 호황에 힘입어 서울 집값이 가파른 폭등세를 보이자, 집값을 잡겠다는 명목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노태우 정부는 주거 안정을 위해 신도시 계획을 발표하고 대규모 신도시 건설에 나섰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의 1기 신도시 분당, 일산, 산본, 중동, 평촌에 29만 2천 호를 건설했습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빌딩 숲을 만들었지요. IMF를 거치고 1999년부터 서울 집값이 다시 폭등하자 정부는 2001년 판교신도시, 2004년 광교신도시, 2006년 위례신도시 등 2기 신도시를 대규모로 건설하여 집값을 잡겠다고 나섰습니다. 이것 역시 큰 효험이 없었습니다. 2기 신도시가 마무리될 무렵인 2014년부터 서울 집값은 상승하다가 2018년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습니다.

 

이에 또 정부에서는 남양주, 하남, 과천, 인천, 고양, 부천 등 여섯 지역에 주택 18만 호를 건설하겠다는 3기 신도시 건설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이 3기 신도시 계획이 정부의 계획대로 진행되면 2022년부터 분양을 시작하여 2024년부터 입주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서울 집값을 잡을 수 있을까요?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신도시 계획이 발표되고 입주를 하기까지 대략 7~8년 이상 걸려 상황이 달라지며, 과거에도 계속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서울 집값의 가장 큰 주범인 인구, 자본, 문화, 교통 등 모든 분야의 서울 집중과 쏠림현상 때문인데 그것은 해결하지 않고 집만 지으니 인구이동집중과 쏠림 현상만 초래하지요. 또 서울이 비대해지는 만큼 지방은 공동화됩니다. 그런데 그런 신도시 계획은 서울만 아닙니다. 평택 송탄, 아산 등 전국적입니다. 최근 아산의 탕정지역만 해도 기존에 추진하던 아산신도시가 이제야 택지 정리가 거의 다 되어가는데 또 356만㎡(약 108만 평) 규모의 면적을 신도시로 개발하겠다고 고시하여 시행에 들어갔습니다.

    

신도시 개발 계획은 설령 집값을 잡는다고 해도 인구와 문화 등 모든 삶의 쏠림현상과 구도심의 심각한 공동화 현상을 초래합니다. 구도심은 통행과 생활이 좀 불편해도 역사와 전통, 삶과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입니다. 신도시가 개발되면 사람들이 앞다투어 신도시로 이주하면서 구도심은 집값 하락은 물론 초고령 지역으로 변하지요. 이 심각한 쏠림과 신도시 집중 현상은 전통적인 삶의 형태를 파괴합니다. 겉으로는 화려하나 속으로는 허전해집니다.

    

신도시 개발이 초래하는 두 번째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원래 신도시 이전의 지역엔 산도 있고 논밭도 있으며 구릉과 웅덩이 냇물과 숲 등 다양한 습지가 있었습니다. 신도시는 그것들을 모두 없애 버리고 깎고 메워 평평하게 하여 구획정리를 하여 도로와 빌딩 등 아스콘과 콘크리트로 도배를 합니다. 물론 계획된 곳에 공원도 만듭니다. 최근에는 공원이 좀 늘기는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공원이 갖는 기능은 숲과 논밭이 가지는 습지 기능에 전혀 미치지 못합니다.

    

최근에는 전원주택 바람이 불어 도시 근교의 낮은 산들을 잘라 깎고 축석을 쌓아 주택단지를 만들고 집을 짓습니다. 어떤 곳은 경사도가 심하여 아슬아슬합니다. 전에는 숲이 우거져 푸른 산이 이제는 산 중턱보다 위까지 숲이 사라지고 주택단지가 보입니다. 멀리서 보면 민망하기도 합니다. 이런 전원주택 단지 건설 바람은 전국적인 현상입니다. 그런 전원주택 바람은 자연부락을 해체하고 공동화시키면서 새로운 갈등을 발생시키고 있지요.

    

신도시 개발이나 전원주택 개발 등을 하지 말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그 개발이 현재와 같이 산과 들판을 깡그리 없애버리는 것에 우려를 보내는 것입니다. 자연 상태의 산과 숲, 논밭의 기능을 살려가면서 만들 수 있는 신도시건설은 도저히 어려울까요? 우린 지금까지 신도시건설로 사라지는 산과 들판의 자연경관과 공원적 기능만 생각해 왔지요. 그러나 그것들이 갖는 가치는 엄청납니다.

    

숲과 논밭, 공원이 가지는 습지 기능과 정서적 기능은 신도시 이상으로 큰 기능입니다. 우선 숲은 물과 빛과 공기의 순환 기능을 가집니다. 거대한 숲은 물을 저장하는 거대한 댐이기도 합니다. 가뭄과 홍수조절은 물론이지요. 숲은 깊고 울창할수록 물의 이동을 강하게 합니다. 나무들은 물을 빨아올려 이파리 끝에서 수증기를 만들어 피어오르게 하고 물기는 대기 중으로 뭉쳐 올라 구름을 만듭니다. 구름은 서로 합해져 물덩어리를 만들어 무게를 견디기 어려우면 털어내지요. 비를 땅에 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의 엄청난 순환 관계이며 그 과정에서 햇볕에 달구어진 땅의 열기를 식혀 줍니다. (차윤정의 『숲의 생활사』 웅진지식하우스 94~98쪽) 숲이 아니면 해결하기 힘든 것입니다. 최근 심한 가뭄과 국지적 폭우 현상은 바로 숲의 이러한 기능을 인간이 문명개발이란 이름으로 마비시켰기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논밭의 습지 기능 또한 엄청납니다. 그런데 논밭 특히 논이 계속 사라지고 있습니다. 도시 근교에 논은 거의 사라지고 밭과 비닐하우스로 변했습니다. 쌀 소비의 급감은 쌀 과잉생산 문제를 낳고 결국 벼농사의 포기를 정부에서도 종용하고 있지요. 논이 갖는 쌀 생산이라는 생산 기능만 염두에 두었지 숲과 같은 습지 기능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논은 엄청난 습지 기능을 수행합니다. 논은 벼를 심으면 거대한 숲과 같이 물의 순환고리를 형성합니다. 논의 물은 땅에 스며들기도 하지만 벼들의 동화작용으로 발생하는 수증기는 하늘로 피어오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다시 물이 되어 비와 이슬 등의 형태로 땅으로 내려오지요. 논의 물은 벼가 자라는 여름 내내 간직됩니다. 겨울에 작물을 심지 않아도 물을 머금고 휴식을 취하지요. 밭도 논에는 못 미치지만, 식물이 자라는 과정에서 물의 흐름을 통한 습지 기능을 톡톡히 합니다. 그런데 신도시 개발은 그것들을 깡그리 사라지게 하는 것이지요. 생태계의 상실과 함께 물의 순환 관계를 마비시키고 땅의 열기를 식혀 주는 습지 기능을 제로 상태로 만들며 강한 열기는 더 생산하지요. 지구는 더욱 더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으로 공원이 갖는 기능은 정말 큽니다. 공원이 많은 지역은 출산율도 높으며 아이들이 건강하고 행복지수도 높습니다. 광운대 정신건강과지역사회연구센터에 의하면, 2017년 1인당 공원면적이 10㎡ 증가할 때마다 10만 명당 자살자 수가 3명씩 줄어들며, 충분한 녹지공간과 공원이 주어지면 신체활동과 사회적 접촉이 활발해져 스트레스 해소와 자살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했습니다. (조선일보 2019. 5. 4. 참고) 세계보건기구(WHO)는 도시에 공원이나 숲 등 주민이 걷고 운동할 수 있는 공원, 녹지 등 자연공간을 충분히 만들어 다양하게 활동하므로 우울증을 예방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게 하며 어린이와 시민이 건강한 살을 눌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초록우산 재단이 전국광역자치단체 17곳의 공원면적을 분석한 결과 세종시가 어린이 1명당 301.1㎡(약90평)으로 1위이며, 2위는 전남(192.5㎡·58평), 3위는 경북(160.8㎡·49평)이었습니다. 서울, 인천 등 9곳은 세종시의 3분의 1(100㎡)에 못 미쳤고, 16위 광주(64.1㎡·19평)와 17위 대구(58.4㎡·17평)는 세종시의 5분의 1 수준이었습니다.(조선일보 2019. 5. 4. 참고) 대구는 지형적으로 분지라 덥기도 하지만 공원과 녹지가 적어 더 덥습니다. 대구시는 오랜 숙원사업으로 도시 나무심기운동을 펼쳐 도시 온도를 낮추기는 했지만, 한계가 크다고 합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1인당 도시공원 면적은 2011년 8.3㎡, 2013년 8.6㎡, 2015년 8.8㎡, 2017년 9.6㎡로 꾸준히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뉴욕(18.6㎡), 런던(26.9㎡), 파리(11.6㎡) 등 선진국에 비하면 크게 부족한 상황입니다. 해외 도시계획 전문가들은 거대한 공원이 하나 있는 것보다 아이들 발 닿는 곳곳에 공원이 많이 있는 도시를 더 높이 평가합니다. 매년 ‘공원 도시’ 순위를 매기는 미국 비영리 단체 ‘트러스트 포 퍼블릭 랜드(The Trust for Public Land·TFPL)’도 ‘10분 내 걸어서 갈 수 있는 공원이 얼마나 많은지’를 평가합니다. (조선일보 2019. 5. 4. 참고) 그런데 우리나라 신도시는 공원에 가기 위해선 마음먹고 가야 하거나 차를 몰고 가야 합니다. 집 인근의 공원은 있어도 형편없어 아이들과 산책하고 놀기가 힘듭니다.

    

더 큰 문제는 공원이 지금도 부족한데 2020년 7월부터는 ‘도시공원 일몰제’가 시행되면 전국 도시공원 용지의 40%가 지정 해제되어 도시공원 40%가 줄어들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지방자치단체가 도시계획법상 공원으로 지정해놓고 20년간 공원으로 조성하거나, 매입하지 않은 땅은 자동으로 지정이 해제되어 원래 소유자에게 개발권을 돌려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시공원 일몰제’가 시행되면, 토지주들은 도시공원 부지였던 땅들을 공원 이외의 용도로 개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도시 곳곳에 공원처럼 이용되던 산과 숲들은 모두 사라지거나 빌딩으로 가려지게 될 공산이 큽니다. 전국적으로 도시공원 용도로 지정된 부지(924㎢) 가운데 이런 땅이 40%인 368㎢에 달한다는 것입니다. 서울 면적의 3분의 2쯤 되는 것이지요. 삶의 환경에 대한 초비상입니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예산 타령만 하고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도시는 점점 황막해지고 열기는 더해갈 것이며 습지 기능은 마비될 것 같아 두렵습니다.

    

다시 시(詩)로 돌아가 “치사하게 네 편 내 편 가르지도 않으며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무데도 물들지 않은 청정淸淨구역 안에서 산다니까요”라고 강하게 말하는 나무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요즈음 네 편 내 편 가르는 치사한 인간들이 너무 많습니다. 종교인들은 수많은 종파를 만들어 자기들만이 진짜 신에게 다가가는 종교라면서 신자들을 유혹하고 혼란 시킵니다. 이 나라 종교는 종파가 왜 그리 많으며 이단은 또 왜 그리 많은지요. 특히 대형 교회일수록 목사가 바뀔 때마다 홍역을 치릅니다. 목사 영입을 놓고 편을 갈라 싸웁니다. 예수를 내세워 예수를 기만하는 것 같습니다. 나도 15년 이상 열심히 교회를 다녔는데 그런 모습에 질려 지금은 교회에 가지 않고 집에서 성경을 읽습니다.

    

네 편 내 편 가르는 치사한 모습은 권력의 집합체인 정치에 가장 심합니다. 모두가 네 편과 내 편입니다. 지금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각종 의혹과 청문회 문제를 두고도 정당과 국민이 갈라져 싸웁니다. 정의와 합리는 사라진 지 오래인 것 같습니다. 네 편도 아니고 내 편도 아닌 사람은 회색분자처럼 별 대접을 못 받습니다. 그런 정치인들이 나라를 위하여 개혁하겠다고 세 치 혀를 놀리며 믿어 달라고 합니다. 울화가 치밀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왜 이 나라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기적인 유전자와 권력욕으로 겸허함을 잃고 오만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치를 가리지 않고 심정적으로 내 편이 아니면 공격하는 방어기제와 보호 본능만 발달한 것 같습니다. 편을 갈라 각자의 진영에서 철학과 원칙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광신적 종파주의나 믿음이 무신교보다 무섭듯이 편집된 철학과 원칙은 철학과 원칙이 없는 것보다 무섭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철학과 교양의 문제입니다. 올바른 철학은 사유를 통해 편집되지 않는 통찰력을 길러줍니다. 그것은 교양을 키우지요. 철학에 관점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자기 관점만 옳다고 우기는 사람은 교양 없는 사이비 철학 꾼입니다. 특히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편싸움이 아닙니다. 변증법에서 어떤 주장 A인 정(正)과 반대 혹은 모순되는 주장 B인 반(反)은 어느 쪽도 부정하지 않고 통합하여 새로운 주장 C인 합(合)으로 진화해 가는 사고 과정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나라 정치는 그 합(合)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철학과 교양 없는 정치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젊은이들과 끊임없이 진리를 찾고 토론했던 소크라테스의 언행을 다시 새기며 배워야 할 때입니다.

    

시(詩)에서 ‘아무데도 물들이 않는 나무’는 공자가 말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자세입니다. 공자는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즉 군자는 조화를 추구하고 획일적이지 않으며, 소인은 획일적이고 조화를 추구하지 않는다.”(논어 자로편 23장)고 했습니다. 군자는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조화를 이루지만, 소인은 서로의 다름을 말하며 어울리지 못하고 똑같기만을 요구한다는 것이지요. 오늘의 한국 정치인들이 동이불화(同而不和)에 빠진 것 같습니다.

    

나는 시에서 의인화된 나무의 입을 통해 치사하게 편 가르지 말고 화이부동의 자세로 살아가라는 나무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정말 숲과 나무는 위대합니다. 우린 그 위대함을 잊었기에 오만해졌습니다. 오래전에 감동적으로 읽었던 “마오우쑤 사막에 나무를 심은 여자 인위쩐의 이야기” 『사막에 숲이 있다.』(이미애 글, 서해문집)가 떠올랐습니다. 중국 네이멍구 자치구 마오우쑤 사막에 스무 살의 나이로 시집가 내던져진 채 절망하다가 여인의 몸으로 비 한 방울 제대로 내리지 않던 1,980만㎡(600만 평)의 거대한 사막에 나무를 심고 가꾸어 숲을 만들고 옥토로 가꾼 인위쩐의 말과 노래를 새겨 봅니다. “사막을 피해 돌아가서는 숲으로 갈 수 없습니다. 사막에 나무를 심었더니 그것이 숲으로 가는 길이 됐지요.”(186쪽) “나무가 살 수 있으면 채소도 산다. 채소가 살 수 있으면 사람도 살 수 있다”(73쪽) “유월이라 정말 무덥기도 하구나/ 하지만 사막의 사류는 잘도 자란다./겹겹의 고비를 만들어 사막의 기승을 꺾네/ 유월이라 정말 무덥기도 하구나/하지만 들판의 곡식은 잘도 자란다/가을에는 햇곡식도 먹을 수 있겠네/유월이라 정말 무덥기도 하구나/하지만 우리의 양들은 잘도 자란다”(166쪽) 나무를 가꾸니 숲을 이루었고 숲이 습지 기능을 수행하니 사람 살 수 있는 곳으로 변했습니다. 숲이 있는 곳은 공원이 되고 사람을 품습니다. 나무의 화이부동의 자세로 삶의 진실과 진리를 향해 인생을 살아간 인위쩐의 땀과 눈물의 의미를 함께 느꼈으면 합니다. 모든 신도시 개발도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무와 숲에게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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