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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씨름》에 담긴 소망은?

이상호 | 입력 : 2019/09/16 [09:12]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추석은 우리 민족의 오랜 명절이자 축제일입니다. 조상에 차례 지내고 가족, 친척들과 묶은 정을 나누며 고향을 찾아가 가슴에 묻어둔 그리움을 달래는 날이지요. 그러나 문명의 발달과 핵가족화의 급속한 진행으로 전통적인 명절의 의미는 쇠퇴해 왔습니다. 이번 추석에도 귀성객은 줄었고 텔레비전에서도 과거와 같은 추석 특집은 적었습니다. 문명은 우리에게 새롭게 가져다 준 것도 많지만, 잃어버리게 한 것도 많습니다. 명절의 훈훈한 풍습이 사라지는 것도 우리가 잃어버린 것 중의 하나입니다. 해마다 추석이 되면 전국적으로 열리던 장사 씨름 대회도 사라져가는 모습입니다. 그 아쉬움을 간직하며 강원석의 시 《씨름한판》을 감상해 봅니다.

    

             씨름한판

                                     - 강원석(1969~  )-

    

모래판에 함성 소리 씨름판에 박수 소리

청 샅바와 홍 샅바에 씨름 한판 벌어진다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씨름 재미 흥이 돋네

팔도강산 씨름 바람 어얼씨구 신이 난다

    

추석에도 씨름 구경 설날에도 씨름 응원

남자 장사 여자장사 모두 나와 씨름 잔치

    

우리 민족 전통문화 인류의 문화유산

세계의 보배로세 대대손손 물려주세

    

모래판에 쏟은 정성 씨름판의 희망이다

온 천하를 번쩍 들고 어얼씨구 달려가자

    

샅바 잡고 땀 흘리며 장사의 길 꿈을 꾸는

꼬마 장사 청년장사 우리 모두 천하장사

    

              - 농민신문(2019.7.12.-

  

강원석은 경남 함안 출생이며 법학박사입니다. 20여 년간 국회와 청와대, 행정안전부 등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공무원 출신의 늦깎이 시인입니다. 『서정문학』 시 부문 신인문학상과 『문학바탕』 동시 부문 신인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지금도 열심히 시를 쓰며 시에 관한 강연을 하고 있답니다. 그의 시는 짧고 쉬우며, 부드러운 표현과 감성적인 묘사로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시《씨름 한판》은 씨름판의 풍경을 그림처럼 묘사했습니다. 씨름은 전통적인 민속 경기로 추석, 단오절, 설날 등 연중 중요한 날에 열렸지요. 옛날에는 씨름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씨름장’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축제로 즐겼습니다.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씨름을 보며 즐겼습니다. 전국이 씨름 잔치에 빠졌지요.

    

지금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론 극도의 분열에 빠져 있으며, 경제가 어렵고 취업하기 힘들며 살기가 어렵다고 난리입니다. 그래도 시인은 “모래판에 쏟은 정성 씨름판의 희망이다/ 온 천하를 번쩍 들고 어얼씨구 달려가자” 즉 우린 희망을 안고 천하를 번쩍 들어 올릴 기세로 세상을 향해 힘차고 즐겁게 달려가자고 합니다. “샅바 잡고 땀 흘리며 장사의 길 꿈을 꾸는” 사람들은 분명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이며 ‘장사의 길’은 우리가 꿈꾸는 목표입니다. 비록 힘들고 지치더라도 목표를 향해 땀 흘리며 나아가야 합니다. “꼬마 장사 청년장사 우리 모두 천하장사”는 각자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 삶의 성공을 거두는 우리 모두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며 총체적으로 어려운 한국 사람들이 삶의 승리를 향해 돌진하는 희망의 한국인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씨름 한판》에는 화합과 단결, 성취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씨름》에는 우리 민족의 삶과 문화, 화합과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씨름》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상고시대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 상고사’에서 씰흠(씨름)은 거룩하고 신성한 신소도에서 제사의식의 하나로 행하였다고 하였으며, 1905년 고구려 옛 도읍지인 만주 통화성 즙안현 통구 환도에서 “씨름 무덤”이 발견되었답니다. 고구려 고분 장천 1호에서도 ‘씨름화’가 발견되어 고구려인들은 단오나 한가위 때 씨름을 즐긴 것으로 추정합니다. (한국민속문화백과 민중서관, 955쪽) 장천 1호 ‘씨름화’에는 유독 다리가 크게 보입니다. 고대의 제사는 풍년과 평화를 기원하는 것이었지요. 풍년의 의미는 농사뿐 아니라, 사냥도 포함됩니다. 농사와 사냥을 잘하려면 힘이 강해야 하고 짐승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래서 고대의 《씨름》은 풍년과 평화를 기원하는 제천행사의 하나였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씨름》에 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인 세종 때 간행한 『고려사』에 의하면, 원나라의 간섭하에 있었던 고려 충숙왕부터 충혜왕 때까지 ‘씨름놀이’가 성행했습니다. 충혜왕은 즉위년(1330년 3월)에 정사를 총신인 배전, 주주 등에게 맡기고 매일 궁중에서 잡무에 종사하는 소동과 씨름을 하여 상하 간 예의가 무너졌답니다. 그러나 충혜왕 복위 4년(1343년 2월)엔 왕이 용사를 이끌고 씨름놀이를 하였으며, 11월에는 고용보와 시가에 행차하여 겨구, 각저희를 보고 용사들에게 포목을 다수 하사했습니다.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 단결과 민족 자주성 회복의 염원을 담은 것이라 해석하기도 합니다.

    

조선 세종 때부터 씨름은 더욱 성행했습니다. 세종 원년(1419년) 6월 15일 태종과 세종은 저자도에 행차하여 종친들과 주연을 베풀고 ‘각려회(씨름의 옛 이름)’를 즐겼으며, 세종 12년(1430) 12월 ‘상총’이란 중이 ‘양복산’이란 양인과 씨름하다가 ‘양복산’이 죽었는데 살인죄로 다스리지 않고 죽은 자의 매장비까지 국가에서 지원하며 관대하게 처분했답니다. 세종 13년 3월 병무조(丙戊條)에는 “경회루 북쪽에 임금이 앉아 종친(宗親)들의 활 쏘는 재주를 구경하고, 역사 안사의(安思義) 등에게 씨름을 하게 한 뒤, 승패에 따라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씨름의 장려로 국민화합을 도모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현종 5년(1664) 5월에 광주 저자도 어느 집 종이 같은 동네에 사는 세현(世玄) 이란 자와 씨름을 하여 이기지 못하자 분풀이로 세현(世玄)을 찔러 죽인 사고가 있고 난 후 사헌부에서 씨름을 금지하는 교지가 내려지기도 했답니다.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씨름이 전국적으로 성행하였지만, 지나친 승부욕에 의한 폐단도 컸음을 말해 줍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씨름》을 시켰다는 기록이 많이 보입니다. “선조 29년 1596년 5월 5일(양력 5월 31일) 맑다, 회령 만호가 교서에 숙배한 뒤에 여러 장수가 모여 회의했다. 들어가 앉아 위로하고 술잔을 네 순배 돌렸다. 경상 수사가 술이 거나하게 취했으므로 씨름을 붙인 결과 낙안군수 임계형이 으뜸이었다. 밤이 깊도록 즐겁게 마시고 뛰어놀게 한 것은 억지로 즐겁게 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수들의 수고를 풀어주고자 한 것이었다.”(최두환 역주 『난중일기』 학민사 266쪽) 고 합니다. 장군은 《씨름》을 통해 수시로 군사들의 사기진작과 체력 단련에 힘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조선 시대의 씨름은 《경도잡지 京都雜誌》 《東國歲時記 동국세시기》 《개성지 開城誌》 등에 두루 전하며, 주로 단오절에 많이 벌어졌고 추석 전후나 중앙절(9월9일) 상원일(1월 15일) 그리고 농한기인 백중일(7월 7일)에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합니다.(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특히 백중일은 당시 노동자들의 명절로 씨름으로 풍년을 기원하고 마을의 단합을 도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제가 닥치면서 씨름은 민족의식의 함양과 단결의 뜻으로 성행했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총독부 차원에서 조선인 융화정책의 하나로 일본인 신문사가 주최하게 하여 씨름을 시행하기도 했는데 이때 승부욕을 지나치게 조장하여 지방간 마을간 분열과 위화감을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씨름을 조선인 분열 책동에 이용한 것이지요.

    

해방 후 현대까지 씨름 대회 때는 농민들이 동네에 모여 농악을 하고 피리를 불어 흥미를 돋우고 씨름의 우승자는 가마를 태워 군중 무용을 펼쳤고, 상품으로 농우(황소)를 주었습니다. 황소는 농사를 위한 대표적인 동물이며 힘의 상징이고, 지금까지 씨름우승자에게 주는 상품이 되었지요. 우리나라에서 씨름은 특히 대구, 김천, 경남, 부산과 마산, 김해 등지에서 발달했는데 모두 풍년과 화합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천수답을 주로 하여 농사를 짓던 옛날엔 물꼬 싸움이 치열하여 형제간에도 다투었는데 하물며 이웃 동네 간에는 말할 것도 없었겠지요. 그래서 마을간 농악과 춤을 곁들인 친선 오락을 즐기면서 씨름 대회를 하여 승리한 마을에서는 “쾌지나 칭칭나네“를 목청껏 부르며 승리를 축하했지요. 그리고 이긴 편 마을 사람들이 논에 물을 먼저 댈 수 있도록 했답니다. 이처럼 조상들은 씨름을 통해 풍년을 기원하고 단결과 화합, 양보의 미덕을 실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씨름은 예술작품에서도 자주 나타나는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단원 김홍도의 《씨름도》입니다. 그의 《씨름도》에는 원형을 이루어 오른쪽 위에 5명, 그 아래에 2명, 왼쪽 위로 8명, 그 아래 엿장수와 4명, 모두 다섯 갈래로 22명이나 되며, 등장하는 인물의 신분도 양반, 중인, 상민, 엿장수까지 다양합니다. 《씨름도》에는 장유유서의 도리를 지키며, 상민이 양반을 이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김홍도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요? 김홍도가 살았던 조선은 영조, 정조의 시기로 치열했던 당쟁이 다소 수그러들기는 했지만, 전국적으로 파당과 갈등의 몸살은 여전했습니다. 특히 정조의 돌연사는 조선을 다시 정치적 격랑에 빠지게 했지요. 그런 정치적 격랑 속에서 동네 간, 같은 동네 내에서도 신분 간의 갈등은 물론 같은 신분 내에서도 갈등은 심했습니다. 그런 갈등을 치유하는 것은 화합과 양보의 미덕이었지요. 아랫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하려면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고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양반이 상민에게 지는 모습을 그린 것 같습니다. 김홍도는 씨름을 통해 신분을 초월한 양보와 화합만이 번영하여 살길임을 호소한 것 같습니다.

    

모든 경기는 승부보다 공정경쟁과 우정, 단결과 화합이란 가치가 우위에 있습니다. 우리 씨름은 체력 단련과 승부가 아니라 단결과 화합을 기원하는 의미가 강한 민속 경기로 인정받아 2018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적폐청산과 혁신을 부르짖지만,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극도의 대립각을 세우고 있으며, 경제 상황은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빈부의 격차와 세대 간의 갈등도 심해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21세기 들어 최대의 갈등기를 겪는 것 같습니다. “혁신은 새로운 시도가 아닌 과거와의 작별에서 시작한다”는 심리학자 쿠르트 레빈(Kurt Lewin 1890~1947)의 말이 떠 오릅니다. 그에 의하면, 혁신을 위해서는 해동(unfreezing)-혼란(moving)-재동결(refreezing)의 단계를 거칩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지금까지의 방식을 ‘잊는’ 것, 즉 이전 방식에 ‘종지부를 찍는 일’입니다. 그러나 진보는 청산과 혁신을 부르짖으며 그냥 산에 그냥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만 할 뿐이지 진정한 새 비전과 행동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보수는 새로운 비전과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언젠가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헛된 기대에 빠진 것 같습니다. (야마구치 슈 지음, 김윤경 옮김,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다산초당 149~154쪽 참조) 진정한 혁신과 성장을 위해서는 모든 진영이 지난 시절에 대한 노스텔지어를 끝내고 새로운 비전과 행동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지난 시절의 앙금으로 싸움만 하니 혁신은커녕 과거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니 줄곧 싸움만 하지요. 단결과 화합은 혁신과 성장의 필수조건인데 말입니다.

    

진정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구의 르네상스처럼 전통의 아름다운 의미를 되새겨 오늘의 방식으로 재창조하는 정신과 행동방식이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과거의 성찰을 통한 악습의 단절과 미덕의 재창조라는 사고와 행동방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즈음에 단결과 화합, 양보와 축하의 미덕을 담은 《씨름》과 모두가 천하장사처럼 함께 성취하는 삶을 바라는 시 《씨름한판》의 의미는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특히 정치인들이 시 《씨름한판》과 단원 김홍도의 《씨름도》에 담긴 소망을 마음과 행동에 새겼으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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