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로 세상 읽기] 천하평국(天下平國)의 꿈은 “한”이 되어

이상호 기자 | 입력 : 2019/11/08 [13:43]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뉴스파고=이상호] 가는 길에 자라섬의 구절초 그윽한 향기도 맡았으며 북한강 물결을 일구는 바람 소리도 들었습니다. 남이섬으로 가는 선착장에 도착하였을 때는 관광객들에게 밀려 배를 탔습니다. 남이섬엔 여전히 외국인들도 많았습니다. 외국인들은 중국인들과 동남아인들이 주를 이루는 것 같았습니다. 한일 무역 갈등의 여파인지 일본인 관광객들은 그리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남이섬에 이번으로 다섯 번째 다녀왔습니다. 젊은 시절 아내와 다녀왔고, 친구들과도 다녀왔으며,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의 결혼기념일(11)에 아내와 겨울 연가의 자취를 보러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그 한겨울에는 소년소녀처럼 모닥불 가에 앉아 말없이 서를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일본인 관광객을 의식한 탓인지 왜색이 짙어 보여 마음이 상했습니다. 남이섬의 모습은 갈 때마다 조금씩 변하고 있었습니다.

 

관광객들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남이섬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남이장군 묘 앞에서 한참 상념에 잠겼습니다. “죄는 지은 것이지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그날 읽은 남이장군의 시는 이 말과 함께 전보다 더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애국충정 넘치는 대장부의 기개가 담긴 시의 한 구절이 훗날 자신을 죽음으로 엮는 덫이 될 줄 알았으랴.’ 남이 장군은 20대에 천하평국(天下平國)의 애국충정을 안고 있었으나, 간신의 모함으로 죽임을 당하고 그의 원혼은 이 되어 남이섬에 떠돌게 되었다고 합니다.

 

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석마도진)이요

豆滿江水飮馬無(두만강수음마무)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이면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리오

- 남이(14411468)-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서 없애고/두만강의 물은 말에게 먹여 없애 버리겠다.”는 데는 장수의 결의와 기개가 넘치지요. 장수는 칼을 벼리고 말을 달려 종횡무진 전장을 누빌 때 그 기상이 크게 드러납니다. 야인들이 북방을 괴롭히고 그것을 평정한 장수의 기개가 넘칩니다. “남자로 태어나 나이 이십에 천하를 평정하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겠는가?” 지나칠 정도로 적나라하게 야망을 드러냈습니다. 이 대목은 천하를 호령하는 자가 되겠다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요. 이 정제되지 않은 야망의 표현이 자신을 죽음으로 옭아매게 되는 도구가 되었지요.

 

이 시는 어릴 적 아버지께 수없이 들어서 가슴 깊게 새겨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틈날 때마다 이 시를 읊조리며 남자는 기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 기개를 감출 줄도 알아야 한다. 기개와 절제는 한 몸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이의 일대기를 보면, 지나친 기개와 남자다운 호연지기, 직설적인 화법과 장수의 순진함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남이는 마음에 이는 것을 참지 못하고 표현하는 습관이 있었지요. 그것은 기개를 넘어서 타인의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남이도 절규하고 싶은 강렬한 감동의 소용돌이를 간신히 잠재우고 있었다. 북으로는 만주벌판을 우러르고 남으로는 한반도를 굽어보는 거대한 이 산악은 지난날 우리 국토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다. 남이는 몸을 날려 호숫가 벼랑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소리 높이 읊조렸다.

 

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석마도진)이요-<중략>-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리오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이면,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

 

야인들은 자기네들의 절규에만 열중하고 있기 때문인지 누구 하나 남이의 목소리엔 귀를 기울이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그늘진 곳에 몸을 죽긴 채 남이의 시구를 곱씹는 자가 있었다. 유자광이었다. 유자광은 남이가 서 있는 벼랑 위에서 십여 보 아래 떨어진 바위 뒤에 숨어 엿듣고 있었던 것이다.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이라?”

또 곱씹다가 그만 재채기를 터뜨렸다. 유자광은 재빨리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지만 늦었다.

-<방기환 소설 남이 장군도서출판 다솔, 1993. 30-31>-

 

남이와 유자광의 기구한 인연을 예고하는 장면입니다. 소설에 의하면, 남이는 세조의 명을 받아 북방의 야인들을 살피러 떠납니다. 그리고 한명회와 신숙주의 추천으로 유자광이 비밀리에 파견되지요. 유자광은 떠날 때부터 한명회와 신숙주의 사주를 받습니다. 남이는 북방의 사정을 살피고 북방안정을 위한 방법을 찾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유자광에겐 남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다른 임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조가 부여한 임무가 아니라 한명회가 부여한 임무입니다. 남이는 북방에 도착하여 이시애를 만나고 이시애의 북방 홀대에 대한 불만과 북방은 북방의 사정을 잘 아는 북방인이 다스려야 한다는 의견에 공감합니다. 돌아와 세조에게 보고할 때 남이는 그런 내용을 그대로 보고하지요. 그 자리에는 한명회와 신숙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유자광은 한명회와 신숙주가 이미 신숙주의 아들 신민을 함길도 관찰사로 내정해 놓은 사실을 알고 다르게 보고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야인들의 모습보다는 그 이면을 살펴야 한다면서 이시애 등을 경계해야 한다고 보고합니다. 그후 북방인을 홀대하는 인사정책이 한명회와 신숙주 등의 농간에 의한 것이라고 불만을 틀어놓는 이시애를 반란 세력으로 몰아가는 과정에서 남이를 엮고자 했으나 세조는 남이를 두둔했습니다.

 

여기서 남이와 유자광의 출생과 신분에 대하여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남이(1441, 세종231468 예종 즉위년)는 본관이 의령으로 태종의 딸인 정선공주(세조의 고모)를 할머니로 두었지만, 아버지가 일찍 죽어 할아버지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할아버지는 남이를 아끼고 사랑하며 키웠습니다. 그런 가계의 덕으로 남이는 문관으로 진출하는데도 모자랄 것이 없었지만, 무예에 재주와 뜻이 강해 17세에 무과에 장원 급제하여 일찍부터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런 남이를 세조는 아꼈습니다.

 

유자광(?1512 중종7)은 조선의 유력한 가문인 유두명의 손자입니다. 아버지 유구는 1439(세종21) 경주부윤을 지냈습니다. 그는 유구와 그 집안 노비인 어머니 나주최씨 사이에서 태어난 서얼이었습니다. 유구는 경주부윤을 할 때 백성을 함부로 때려죽여 파직당했습니다. 그러나 집안은 넉넉했으며 그에겐 도승지, 호조 참판, 대사헌 등 승승장구하는 벼슬을 한 적자인 형 유자환이 있었으나, 갑자기 병사하여 집안의 살림이 거의 그의 손에 좌지우지되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 서얼이란 신분에 울분을 품고 방황했으나 출세를 위해 사서삼경 등 독서에 매진했습니다. 그의 모든 배움과 독서는 뒷날 출세와 모함에 이용되었습니다. 그는 조선 역사상 임사홍, 김자점 등과 함께 최고의 간신으로 기록됩니다.

 

 

이시애(?1467 세조13)의 난 때 남이는 구성군 이준이 이끄는 4도 병마도총사 휘하의 대장이 되어 난을 평정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워 전쟁 중에 장군이 되었습니다. 그때 나이 27세였습니다. 남이는 이때부터 명장으로 이름을 크게 떨칩니다. 그 후 남이는 행부호군(行副護軍)을 거쳐 정4품 행호군(行護軍)에 임명되었고, 뒷날 적개 1등 공신과 의산군에 책봉되었습니다. 그리고 공조판서를 거쳐 1468년에는 오위도총관을 겸임하며 그의 나이 28세에 병조판서에 이릅니다. 그러나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의 승승장구와 신진 세력의 득세를 경계한 한명회와 신숙주 등의 이간과 모략으로 남이는 강순, 문효량, 최원, 조영달 등과 함께 역모의 죄를 쓰고 능지처참과 멸문지화를 당했습니다.

 

남이와 유자광은 기구한 운명 탓인지 전장에도 함께 나가고 관직 생활도 함께 했지만 유자광은 늘 남이의 그늘에 가렸습니다. 유자광은 출세를 위해 한명회와 신숙주에게 붙어 모함과 특유한 언변으로 세조의 큰 환심까지 샀습니다. 유자광은 남이를 무너뜨리는 일이 쉽지 않자 온갖 추잡한 행위를 다합니다. 방기환의 소설 속에 묘사된 유자광의 남이 모함작전을 보면 이렇습니다. 유자광은 아이 가지기를 간구하는 남이의 소실인 이씨를 그의 애첩 기생 산홍을 이용하여 암자로 불러 내여 겁탈하고 임신을 하게 합니다. 남이의 소실 이씨가 유자광의 말을 잘 듣지 않자 산홍을 이용하여 광릉 숲으로 불러 다시 성폭력을 가하고 그것을 미끼로 이씨의 몸종으로 첩자를 심어 남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캐냅니다. 그러한 일련의 간계가 세조 때에는 효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종이 즉위하자 유자광은 신구 세력의 갈등 속에서 구세력인 한명회와 신숙주의 편에 서서 신진 세력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는 남이 등을 철저하게 모함합니다.

예종 즉위 원년 한명회 신숙주 등 원상(院相)세력에 의해 구성군, 강순 등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등장한 신진 세력이 제거될 때 형조판서 강희맹이 지중추부사 한계희에게 남이의 사람됨이 군사를 장악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한 것을 한계희가 예종에게 아뢰어 남이는 병조판서에서 해직되고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강등됩니다. 이로써 남이는 불만 세력으로 분류되지요. 그후 남이가 궁궐 안에서 숙직을 하던 중 혜성이 나타났습니다. 남이는 이를 보고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했는데 이를 엿들은 병조참지(兵曹參知) 유자광이 역모를 도모했다고 모함했습니다. 이때 유자광은 남이가 백두산에서 읊은 시의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이면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리오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得國(남아이십미득국)으로 조작하여 아룀으로써 남이는 일찍부터 역모를 도모한 인물로 단정되고 능지처참(凌遲處斬)과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습니다.

 

유자광은 모함으로 출세 가도를 달려 공신에 이르기까지 했으나 중종 때 반정공신이었던 박원종과 노공필을 모함하여 죽이려다 도리어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까지 일으킨 죄인으로 분류되어 공신록에서 삭제되고 파직되어 유배형에 처해 졌다가 1512(중종 7) 673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죽었습니다. 남이는 1818(순조 18)이 되어서야 후손인 남공철의 주청으로 남이와 함께 역모의 죄로 죽은 강순 등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습니다. 이때 남이에게 충무공(忠武公)이란 시효가 내려졌습니다.

 

역모의 죄로 능지처참과 멸문지화를 당한 남이의 시신은 누군가 수습하여 지금의 남이섬에 묘를 썼다고 전해 왔기에 남이섬이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원래 남이 장군의 무덤은 초라한 돌무덤이었는데 이를 모르고 남이섬의 돌을 집으로 가져가면 그 집안에 우환이 생겼다는 전설까지 있을 정도로 남이섬에는 남이 장군의 원혼이 서린 곳이었답니다. 그러나 1966년 경춘관광개발공사가 종합 휴양지로 개발할 때 남이 장군의 돌무덤을 손질하여 지금의 남이장군 묘로 가꾼 후 그런 일이 없어졌답니다. 이제 남이 장군의 슬픔과 한을 담은 남이섬은 그 사연은 뒤로하고 연인들과 관광객들이 찾는 대한민국의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영화 [변호인], [재심] 등이 수많은 관객의 가슴을 울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복비(腹誹)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중국 한무제 때 장탕의 고사로 정치적으로 반대파나 못마땅한 사람을 척결하하기 위해 겉으로는 뚜렷한 잘못이 드러나지 않지만, 속으로는 흑심을 품었거나 반대한다는 죄를 씌워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수사상의 강압과 조작으로 억울하게 죄인이 되어 고초를 겪은 이가 많습니다. 살인자로 복역 중인 이춘재가 화성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한 자백으로 세상이 술렁입니다. 죄는 지은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수사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철저하게 죄를 가려야 하며, 수사 실적을 위해 강압이나 성급한 단정을 지어서는 더욱 안 됩니다. 억울한 청춘의 삶과 생명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가 만들어지지 않고 지은 죄는 제대로 규명하여 단죄하는 정의롭고 인간다운 사회를 꿈꾸어 봅니다. 남이 장군의 시를 읽으며 앞으로는 이 세상에 억울한 원혼이 나타나지 않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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