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로 세상 읽기] 《크래커 부수기》로 우울과 분노를 키우는 아이가 없는 세상을 꿈꾸며

이상호 | 입력 : 2019/12/05 [13:38]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건강한 선진사회는 소득뿐만 아니라 문화와 교양 수준이 높고, 폭력과 범죄, 우울과 충동적 분노 표출이 없는 사회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살률 세계 1위에다가 연일 벌어지는 파렴치한 폭력과 살인 행위를 보면, 우리나라는 아직 건강사회로 가기엔 길이 먼 것 같습니다.

 

그런 일탈적 행동은 10대부터 30대까지가 주류를 이룹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중 2라는 말이 증명이라도 하듯이, 한계를 넘어선 청소년들의 학교폭력과 성폭력 사건, 심지어 교사 폭행까지 그 한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봉화의 면사무소 엽총 사건 등 노인들까지 우발적 폭력과 난동이 많아지는 등 60 대 이후도 한 몫 합니다. 특히 전 남편을 살해한 고유정과 모텔 투숙객을 살인하고 시신을 유기한 장대호의 태연함에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사회구성원들 상당수가 우울과 분노를 견뎌내지 못하고,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에 길들어져 있음을 말해줍니다. 왜 우리나라엔 우울과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악의 평범성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많을까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그들의 성장 과정과 삶을 돌아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올 것 같습니다. 지금 10대부터 30대까지는 홀로 집과 학교 학원을 오가야 했던 심심한 세대였습니다. 60 이후는 베이비붐 세대로 정신없이 살아왔는데 노후가 암담한 허탈해진 세대들입니다. 심심함과 허탈함, 악의 평범성 등의 심리 현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진행형입니다. 이글에서는 30대 이전 세대에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신미균의 시() 크래커 부수기는 어린 시절부터 우울과 분노를 축적하는 아이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크래커 부수기

                                                               -신미균-

 

  돌아오지 않는 엄마 대신

  크래커를 부순다

  건건찝질한 크래커

  밥 대신 하루 종일 먹으라고

  두고 간 크래커

 

  부술 때마다 바삭거리는 소리 때문에

  자꾸만 부수던 크래커

  손가락으로 부수다가

  발가락으로 문대다가

  온몸으로 뒹굴다 보면

  가루가 되는 크래커

 

  검은깨인 줄 알고 먹었던

  개미들이

  꿈틀꿈틀 되살아난다, 지금

  크래커를 두고 갔다 올

  엄마도 없는데

 

                 -<신미균웃는 나무, 서정시학 시인선, 2007>-

 

엄마와 아이 사이의 천륜인 모성이란 애착 관계가 크래커처럼 부서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크래커는 엄마가 떠나면서 아이에게 주고 간 그 어떤 것의 상징입니다. 엄마는 어떤 사연인지 아이 혼자 두고 집을 나가고 집에는 아이 외엔 아무도 없습니다. 엄마가 나갈 때 아이가 종일 밥 대신 먹으라고 두고 간 건건찝질한 크래커를 아이는 기다리던 엄마 대신 사정없이 부수고 있습니다. 부술 때마다 나는 바삭거리는 소리가 성가시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부수는 소리가 엄마의 메아리일 수도 있습니다. “손가락으로 부수다가/발가락으로 문대다가/온몸으로 뒹굴다 보면/가루가 되는 크래커는 아기의 손에 쥐어진 모성입니다. 늦게 온 엄마, 오지 않는 엄마에 대한 분노가 강하게 표출됩니다. “검은깨인 줄 알고 먹었던/개미들이/꿈틀꿈틀 되살아납니다. 아이에게 위협이 닥칩니다. 개미는 무엇일까요? 엄마를 기다리다 지친 아이를 괴롭히는 우울과 분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크래커를 두고 갈 엄마마저 없는 아이들이 있어 더 안타깝습니다.

 

이 시는 산업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아빠, 엄마 모두 일터에 나가고 아이 혼자 집에 있어야 하는 상황, 그런 시대에 육아의 어려움을 표현한 시이기도 하지만 더 포괄적으로 보면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이 성장 과정에서 겪게 되는 문제점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엄마는 왜 아이 혼자만 두고 집을 나갔을까요? 아이를 혼자 두고 맞벌이를 안 하면 안 되는 부부의 사연일 수도 있겠고, 아빠 없이 엄마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에게 크래커를 주고 돈 벌러 나간 경우일 수도 있겠고, 아기에게 크래커를 주며 안심시켜 놓고 자기만의 살길을 찾아 훌쩍 떠난 엄마의 경우일 수 있을 것이며, 어느 미혼모의 아픈 사연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아이는 혼자 버려져 있습니다.

 

엄마가 있는 아이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최근에는 보육 관련법이 정비되고 정부의 지원이 강화되었다고 하지만, 퇴근 시간까지 아이들을 책임지는 보육 기관은 많지 않습니다. 보육원, 유치원, 초등학교에 들어가도, 중학생이 되고 방과 후 활동을 하여도 나머지 시간은 학원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입니다. 아이들은 부모나 형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아니라 종일토록 주어진 프로그램에 얽매여 있지요. 한국의 아이들은 학원에서 성장합니다. 그건 때로는 아이들의 숨통을 조이고 또 다른 방법으로 구속합니다. 아이들은 밤에 돌아온 엄마 앞에서 열심히 공부했다는 방어적인 거짓을 만들기도 하지요.

 

지금은 그래도 낫다지만, 10대부터 30대까지는 정말 홀로였던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육아를 위한 사회 보장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사정이 좀 나은 아이들은 조부모나 남의 손에 키워졌지만, 상당한 수의 아이들은 학원에 갈 수도 없이 심심하게 엄마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엄마는 돌아와 그날 아이에게 준 과제를 점검하며 닦달하기도 합니다. 기다림에 지친 아이의 가슴엔 엄마와 자신과 세상에 대한 우울과 분노를 쌓아 갑니다.

 

엄마가 없는 아이들은 더 비극적입니다. 어떤 아이들은 보육원에 맡겨졌고, 어떤 아이들은 조부모에게 맡겨졌으며, 어떤 아이들은 그냥 방치되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엄마 있는 아이들이 엄청나게 부러웠을 것이고 아예 포기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엄마의 사랑에 대한 상실감과 우울과 분노를 키웠을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인간은 누구나 내면세계와 외부 현실 간에 갈등을 겪습니다. 그 중심에는 생에 초기부터 깊은 관계를 맺어 온 인물들이 있는데 중심에 엄마가 존재하지요. 엄마 있는 아이들은 존재하는 엄마라는 외부 현실과의 관계를 통해 내부세계가 형성되며, 엄마 없는 아이들은 존재하지 않는 엄마라는 외부 현실 관계를 통해 내부세계가 형성되어 갑니다. 엄마가 존재하는 아이들은 엄마와의 현실 관계에 따라 긍정적 자아가 형성되기도 하고 부정적 자아가 형성되기도 하며, 밝고 진취적이며 배려심 있는 자아가 형성되기도 하고 우울하고 분노하는 공격적인 자아가 형성되기도 합니다. 엄마라는 현실 존재가 없는 아이는 아예 포기하여 스스로 자아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이는 극소수이며 대부분은 상실감 속에 열등과 우울과 분노를 키우며 살아가게 됩니다. 아이들은 엄마라는 현실 존재와의 애착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데 상실과 우울과 분노 속에 사는 아이들은 이런 애착 관계가 바르게 형성되지 못하지요. 어른이 되면서 그 상실과 우울과 분노가 잘 승화되고 절제된 사람은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아가지만, 그렇지 못하면 어떤 면으로든 일탈 행동을 하게 됩니다.

 

페이버릿 차일드 콤플렉스를 주장한 엘렌 웨버 리비(Ellen Weber Libby)페이버릿 차일드(김정희 옮김, 동아일보사, 2011)에서 총애를 받고 자란 아이든 총애(관심과 보살핌 등)를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이든 그 총애가 바르고 절제되지 못하면 일탈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총애를 전혀 받지 못한 아이들은 내면 구석에 우울과 분노의 응어리를 키워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장 과정에서의 바른 애착 관계와 바른 총애는 매우 중요합니다.

 

전통사회의 인간은 욕망의 금지로 인한 상실과 죄책감을 느끼는 인간이라면 현대 사회의 인간은 존재감의 위협으로 인한 불안을 느끼는 비극적 인간입니다. 현대인은 존재의 강한 위협이 닥치면 우울증에 빠지고 분노하며, 지나치면 자살이나 폭력 등 극단적인 행위로 표출되는 비극을 연출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는 내적인 힘을 키워야 하는데, 그것은 일차적으로 부모 특히 엄마와의 애착 관계에서 형성됩니다. 부모 특히 엄마는 성장 과정에서 일차적인 역할 모델이며 동일시의 대상입니다. 엄마와의 애착 관계가 왜곡되면 아이는 소중한 역할 모델과 동일시 대상을 상실하게 되지요. 그때 아이들은 상실감과 우울과 분노를 겪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가 승화되지 못하고 가슴속에 맴돌 때 폭력과 이상행동으로 표출합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엄마는 너무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의 30대까지는 그런 애착 관계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엄마가 없는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는 엄마에 대한 분노를 마음에 담으며 성장했지요. 그것이 지금 큰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산업화 과정에서 30대 이전이 가장 처참하게 엄마 없는 생활을 해 왔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세대별 성장 특징을 보면 60대 이후는 농경사회였으므로 동네라는 공동체 안에서 형제나 친구들과 마음껏 뛰놀던 세대들입니다. 4050대는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지만 상당 부분 농경 사회적인 정서와 분위기가 혼재해 있어 그 이전 세대들만큼은 아니지만, 심심함으로 지내던 세대는 아닙니다. 그러나 30대 이전 세대는 급속한 산업화와 여성의 사회진출, 노동집약적인 직장 생활 등으로 엄마를 기다리는 심심함과 우울과 분노를 키우며 살아온 세대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들은 심리적으로 가장 상처받은 세대들입니다. 이런 세대 중 일부는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거나 죄에 무감각해지는 이른바 <악의 평범성>에 물들기도 하지요.

 

이처럼 엄마를 기다리며 우울과 분노를 안고 살아간 세대들에게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출산 기피에 의한 출산율 0.98이란 심각한 위기 상황입니다. 상당수의 젊은 세대가 가진 출산과 육아 콤플렉스는 자식을 낳아 자신의 어린 시절처럼 엄마 없이 심심함과 우울함을 간직하고 학원을 맴돌며 성장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지요. 그들은 나의 아이에게 나처럼 엄마의 사랑을 주지 못하고 키울 바엔 아예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둘째는 자신이 받지 못한 애정을 무분별하게 쏟아주어 절제 없는 아이로 키우게 됩니다. 무절제하게 키운 아이는 자신감은 있을지 몰라도 도덕적 자아가 미성숙되어 문제를 일으킵니다. 셋째, 결혼문제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결혼율 저하의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경제적인 문제와 직장 문제 및 직장의 경력 단절 등 복합요인이 있지만, 정서적 인간관계의 미숙도 있습니다. 정서적 인간관계의 미숙은 감정이입과 사랑의 감정을 상대에게 쉽게 전달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지요. 그것은 홀로 성장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총체적 불안 요인입니다.

 

이제부터라도 국가와 지방 자치단체는 이런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서둘러 실질적인 육아와 출산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출산율뿐 아니라 이혼율이 급증하고 미혼모가 늘어가고 혼인율마저 계속 떨어지는 세상이지만 그에 대한 대책은 아직 미미합니다. 정치인들은 파당 싸움만 하며 무사안일로 있다가 큰 사건이 터져야 누구 법이니 하면서 부랴부랴 법을 만들어 세상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이 오늘의 한국 정치 상황입니다. 이제부터라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육아와 출산 대책을 통해 엄마 없는 아이들을 만들지 않고 체계적이고 바람직하게 엄마의 사랑을 느끼며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엄마가 직장에서 늦게 오더라도 아이들이 엄마가 있는 것처럼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 보장은 그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미래를 위한 투자란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온 국민이 이런 심각성을 깨닫고 함께 나서서 정부와 정치인들을 압박해야 합니다. 앞으로는 크래커를 부수며 우울과 분노를 키우는 아이가 없는 세상을 꿈꾸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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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린 2019/12/27 [09:08] 수정 | 삭제
  • 신미균의 시,, 인데요 심미균의 시,, 라고 쓰셨네요,, 본문에요~~^^ 신미균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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