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로 세상 읽기] 갑질하는 을의 횡포를 꾸짖는 《자정의 심의》

이상호 | 입력 : 2020/01/28 [09:04]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육군 대장의 공관병 갑질, 대한항공 땅콩 회유 사건 등 갑질 사건이 한동안 많은 이들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갑질이란 자본, 지위, 권력 등 어떤 것이든 우위에 있는 사람이 하위에 있는 사람을 마음대로 부려 먹고 못살게 구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갑질은 겉으로 드러낸 제도적 우위에 있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약자가 약자를 괴롭히고, 배고픈 자가 배고픈 자를 괴롭히는 일들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지금 골칫거리가 된 학교 폭력이나 집단 따돌림, 괴롭힘 등도 일종이 갑질입니다. 갑질은 약자의 삶을 짓밟는 것이기도 하지만 최종적으로 함께 몰락하게도 합니다. 

 

             자정의 심의 

 

- 사를 보들레르(1821~1867)-

  

자정을 치는 괘종은 

빈정거리며 우리에게 권한다 

지나간 날을 어떻게 

보냈나 회상하라고 

 

오늘은 숙명적인 날 

금요일에 열사흘, 우리는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단자의 생활을 보냈다 

 

우리는 예수를 모욕하였다 

세상에도 엄연한 신을! 

그 어느 괴물 같은 ‘백만장자’의 

식탁에 앉은 식객과 같이 

짐승 같은 작자의 비위를 맞춘답시고 

실로 ‘악마’의 앞잡이답게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는 욕을 보이고 

우리를 냉대하는 것에는 알랑거리고, 

 

비굴한 망나니처럼, 억울하게 멸시받는 약자를 슬프게 하고 

황소의 이마를 가진 ‘어리석음’에 

저 엄청난 ‘어리석음’에 예배를 하고 

경건한 마음에 넘쳐 

바보 같은 ‘물질’에 입을 맞추고 

창백한 빛을 축복하였다 

 

끝으로 우리는 영광 속에서 

현깃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리라’의 자랑스러운 사제 

서글픈 것들에서 도취를 

끌어냄이 영광인 우리는 

기갈 없이 마시고 먹었다!...... 

ㅡ 어서 등불을 끄자 

어둠 속에 이 몸을 감추기 위해!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악의 꽃』(김인환 옮김, 앙리 마티스 그림, 문예출판사, 2018)에서-

 

노동 현장에서도 갑질은 나타납니다. 먼저 입사한 선배가 후배에게, 유리한 보직과 지위에 있는 사람이 불리한 보직과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갑질을 하는 경우는 허다했습니다. 작년 연말에는 경남 양산시 동면 사송신도시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크레인 기사들을 중심으로 한국노총 노동자들이 민주노총 노동자들을 향해 “다른 노조이거나 비조합원들의 생존권까지 짓밟는 민노총은 노동 현장에서 갑질과 반노동적인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면서 시위를 벌인 일이 있었습니다. 노동자는 사용자와의 관계에서 스스로 을(乙)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개별적인 을이 노동단체를 만들어 뭉치면 엄청난 힘을 가진 갑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을이 또 다른 을에게 갑질을 하기도 하지요.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인간은 정말 갑질 없는 평등한 공생의 삶을 살 수 없는 존재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 ~1867)의 시 《자정의 심의》를 다시 읽었습니다. 

 

“작가는 세상의 적이다.”고 말했던 보들레르가 생존 시에는 빛을 보지 못했던 시집 『악의 꽃』은 뒷날 엄청난 찬사를 받으며 보들레르를 계속 재탄생시킵니다. 『악의 꽃』은 낭만주의를 넘어 상징주의를 품었으며, 현대 시의 초석을 다졌으며 이전의 시가 표현하지 못했던 인간의 심연을 다루었고, 공감각을 이용해 독자의 감각자극을 극대화하는 욕망의 시를 썼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폴 발레리(Paul Valéry 1871~1945.)는 보들레르를 “프랑스어의 국경을 넘은 최초의 시인”이라고 평했고,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1965) 역시 “난 영어를 쓰는 미국의 시인이지만, 보들레르의 예술세계 안에서 시를 배웠다”고 하면서 극찬했습니다. 

 

그러나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은 출판 당시에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1857년 시집 『악의 꽃』 제1판이 출간되자 법원은 미풍양속 훼손을 이유로 벌금형과 함께 시 여섯 편의 삭제를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시를 썼고 관능적 욕망과 육체적 쾌락에서 ‘아름다움’을 찾았습니다. 그의 시집 『악의 꽃』은 거대한 고통이자 공포였던 ‘아름다움’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아름다움’을 찾아 헤맸던 보들레르의 생애처럼 유혹과 파멸, 금기와 호기심, 현재와 영원의 극복할 수 없는 간격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쩌면 보들레르는 자신의 말처럼 ‘세상의 적’이었는지 모릅니다. 

 

위의 시 《자정의 심의》는 예수의 고발과 심문,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건의 성찰을 통해 현대의 정치와 권력의 모순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모든 삶의 역사는 비굴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 비굴한 삶의 역사를 성찰하여야 정당한 삶의 역사를 쓸 수 있습니다. 

 

시의 이해를 위해 마태복음(26장~28장) 등 성경의 여러 기록에 나타난 예수 재판의 역사를 살펴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으며 군중 폭동이 염려되는 사회 분위기에서 빌라도의 가장 큰 고민은 군중들의 마음을 어떻게 달래느냐에 있었습니다. 예수의 죄목은 사람들을 사교에 빠뜨리고 대중 폭동을 선동하였다는 것, 사람들에게 로마(시저)에 바칠 세금을 바치지 못하게 하였다는 점,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부르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가룟 유다를 돈으로 매수한 대제사장들과 이스라엘 군중들에 의해 은밀하게 체포되었고 목요일 자정 무렵부터 금요일 새벽 3시경까지 심문을 당했습니다. 

 

예수에 대한 유대인의 재판은 ① 전임 대제사장인 안나스의 비공식적인 예비 심문 ② 대제사장인 가야바와 산해드린의 심문 ③ 산해드린의 심문과 빌라도의 최종 판결의 순서로 진행되었으며 유월절 사면(赦免)의 대상에도 포함하여 명목상으로는 절차상 어긋남이 없는 듯 보입니다. 금요일 아침 빌라도는 증거에 입각한 죄의 규명과 판결이 아니라 철저하게 군중들의 의사에 맡겼으며 군중들에 의해 십자가 처형이란 방법을 택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정치적으로 조작되었으며, 절차도 합법적이지 못했습니다. 예수 처형에 앞장선 사람들도 이스라엘 제사장들과 군중들이었으며, 그들은 동족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악랄한 처형에 앞장섰습니다. 갑(甲)과 을(乙)의 관계에서 을(乙)이 다른 을(乙)을 악랄하게 죽인 것이지요. 이 재판에 참여한 모든 자, 특히 을(乙)은 비겁함마저 모르는 성찰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자정을 알리는 괘종은 잠자리에 들라는 신호로 받아들이지만, 시인에게는 강렬한 성찰의 종소리로 느껴집니다. 제1연의 ‘자정을 치는 괘종이 지나간 날을 어떻게 보냈나 회상하라고 빈정거리며 우리에게 권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는 자정 무렵에 체포되어 밤새워 심문을 받고 정의보다는 편견에 빠졌던 군중과 자리에 연연했던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예수의 체포와 십자가 처형의 역사는 당시 부패한 제사장들과 로마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동족인 유대인들, 돈에 눈이 어두웠던 제자 가룟 유다의 고발로 조작된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체포와 재판이 열린 그 [자정의 심의]는 매우 불공정하며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린 지금도 그런 비굴한 재판에 동참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시인의 말대로 우린 정의와 진리 앞에 ‘이단자’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인은 “오늘은 숙명적인 날, 금요일에 열사흘, 우리는,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단자의 생활을 보냈다.”고 성찰합니다. 예수는 체포되어 밤새 심문을 받고 금요일 아침에 빌라도 앞에서 최종 심문을 받았습니다. 심문의 현장에는 모두 예수를 처형하고자 하는 제사장들과 군중들뿐이었습니다. 제자 베드로가 먼발치에서 지켜보았으나 그도 예수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모두 예수를 배반한 이단자들이었지요. 오늘을 사는 우리도 진리와 정의보다는 비굴한 삶의 편에 서서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씌우거나, 죄가 아님을 알면서도 비굴하게 침묵하는 이단자가 아닌지 모릅니다. 

 

우린 어떤 이유로든 삶을 핑계로 진리와 정의를 모욕하였는지 모릅니다. 제3연에서 “우리는 예수를 모욕하였다/ 세상에도 엄연한 신을!”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진리이자 천명(天命)입니다. 그래서 예수에 대한 모욕은 진리와 정의, 천명에 대한 모욕이며 배반입니다. “그 어느 괴물 같은 ‘백만장자’의/ 식탁에 앉은 식객과 같이/짐승 같은 작자의 비위를 맞춘답시고/ 실로 ‘악마’의 앞잡이답게/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는 욕을 보이고/ 우리를 냉대하는 것에는 알랑거리고” 살아가는 삶은 치사하고 비굴합니다. 여기서 백만장자는 빌라도일 것이고, 로마의 권력일 것이고, 오늘날에는 비굴한 자본과 권력을 가진 자들일 것입니다. ‘식탁에 앉은 식객’은 그 주변을 맴돌며 굽신거려 알량한 권력과 부를 얻어 살아가는 비굴한 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그 짐승 같은 자들의 비위를 맞춘답시고 악마의 앞잡이가 되어 정의를 배반하고 불의의 편에 서서 알랑거릴 것입니다. 

 

정의를 배반하며 불의의 편에 서서 살아가는 자들은 예수를 고발하고 사형에 처할 것을 주창하는 유대 군중과 대제사장들, 그것을 원하는 재판관들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비굴한 망나니처럼” 억울하게 멸시받는 약자를 슬프게 하는 칼을 휘두르며, 아무것에나 들이받는 “황소의 이마를 가진 저 엄청난 ‘어리석음’에 예배를 하고”도 잘못을 깨닫기보다는 오히려 잘했다고 “경건한 마음에 넘쳐” “바보 같은 ‘물질’에 입을 맞추고” “창백한 빛을 축복”한 전혀 성찰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동안 “영광 속에서, 현깃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리라’의 자랑스러운 사제, 서글픈 것들에서 도취를 끌어냄이 영광처럼 기갈 없이 마시고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린 지금도 그런 삶을 성찰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어둠 속에 이 몸을 감추기 위해 어서 등불을 끄자”고 합니다. 죄를 성찰하지 못하고 반복하는 시대와 그 시대의 인간들, 성찰하지 못하는 너무나 부끄러운 군상들인지 모릅니다. 

 

이 시는 오래된 과거의 사건을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다짐하게 합니다. 불의가 정의를 딛고 서는 세상, 불합리가 합리를 짓밟는 세상, 힘으로 소수의 정의를 압제하는 세상, 정의와 진리로 성찰하지 못하는 다수의 군중에 의해 의사결정이나 세상이 지배되는 세상은 끝내야 하지만, 지금도 권력에 아부하며 알랑거리고, 약자들이면서도 권력과 지위를 가지면 영혼 없이 저보다 못한 약자를 짓밟는 사람들은 넘쳐납니다. 

 

성경의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마태복음 18장 21~36절)에 만 달란트를 빚진 자의 사정을 들어 주인이 용서해 주었더니, 돌아가서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에게 가혹하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983년 작가 윤흥길에게 제3회 현대문학상을 안겨준 소설 『완장』에서 마을 한량으로 살다가 땅 투기로 부자가 된 최 사장이 사들인 유명한 낚시터인 김제 백산저수지의 감독관이 된 임종술은 최 사장이 채워준 관리인 완장을 차고 사람들에게 온갖 행패를 부립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Animal Farm)』(1945) 역시 그런 권력과 권력 주변의 속성을 해학적으로 풍자하고 있지요. 모두 갑질하는 을의 이야기입니다. 을이 완장을 차면 갑을 넘어서는 갑질을 해댈 수 있음을 경고 풍자합니다.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이 모두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면서 서로 배려하는 이상적인 사회건설을 꿈꾸었지만, 지배욕과 권력은 강자에게는 약하지만, 약자에겐 강한 속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지위와 권력을 가지면 그 힘을 발휘하게 되는데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나 ‘완장’, ‘동물농장’에서처럼 오히려 약자의 지위에 있는 자들이 권력에 알랑거려 권력을 얻어 갑의 위치가 되면 함께 있던 약자들을 더 괴롭히는 이른바 이완용과 같은 극단적 친일파같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 옛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자들도 그 시대의 약자인 로마 식민지인인 유대인들이었듯이 지금도 그런 현상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정치적 약자들이 정권을 잡으면 더 가혹하게 이전 정권을 단죄하는 사화와 당쟁으로 얼룩진 아픈 역사를 가진 우리는 아직도 권위주의 시대에 사는 것 같습니다. 끝없는 정쟁과 보복이 연속되는 세상,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는 개처럼 굽신거리다가 국회의원이 되고 나면 고개를 숙일지 모르고 자기들의 이권은 모두 챙기는 파렴치함, 권력의 주변에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처럼 약자들이 권력을 가지면 더 심하게 권력을 행사하고 심지어는 엄청난 독재를 감행하며 그 지위와 권력을 영구히 독점하려 들게 되지요. 

 

진리와 정의 안에서 배려와 상생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갑질은 사라져야 합니다. 특히 무고한 사람을 정치적인 이유로 죄를 씌워 처벌하는 일은 더욱 없어져야 합니다. 모든 지위와 권력이 부패하고 횡포를 일삼는 것은 성찰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권력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고통을 주고 있으며 얼마나 불합리한가에 대한 내적 성찰이 있다면 지위와 권력은 진리와 정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위의 시 《자정의 심의》는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을이면서도 알량한 권력에 아부하여 지위를 얻고 그것을 누리며 행패를 부리는 자들에게, 알량한 갑이 된 후 을이었던 시절에 함께 했던 많은 동료에게 더욱 강하게 거들먹거리는 자들에게 제발 성찰하는 삶을 살라고 경고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권력이 스스로 내면을 성찰하므로 진리와 정의, 배려와 상생의 길로 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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