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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다시 그 뜨거웠던 《역사 앞에서》

이상호 | 입력 : 2020/06/10 [09:18]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어제는 30도를 넘었다. 올해 여름도 무척 뜨거울 것 같다. 희망과 낭만에 부풀어야 하는 올 봄은 코로나 19와 총선, 5.18 등으로 아픔과 갈등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6월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역사적으로 우리의 봄과 여름은 낭만적이지 못하다. 3월은 3.15 부정선거가 4월은 4.19 혁명이 있었다. 5월은 5.16쿠데타와 5.18 광주 민주항쟁이 있었고,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6월엔 지금은 6.10 민주항쟁에 무게를 싣고 있지만,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은 현대사에 가장 뜨겁고 처참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현충일 행사에 천안함 유족 초청이 빠져 논란이 일었다. 7월은 최초의 헌법이 공표된 제헌절이 있고 8월은 8.15해방과 8.29일 경술국치일이 있다.

 

이런 뜨거웠던 《역사 앞에서》 일본인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정대협>의 윤미향 사건이 논쟁거리가 되었다. 윤미향 사건은 정치적 논쟁 사항이 아닌데도 정치적 논쟁으로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 정대협의 존재도 일제 치하에서 처참하게 희생된 분들의 아픈 역사 앞에 숙연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 정치에서 그렇지 못하다. 안타깝다. 

 

한국 현대사에서 특히 봄과 여름에 일어난 사건이 유독 뜨겁다. 특히 현 정권 들어 역사 바로잡기란 명목하에 진행된 역사 논쟁의 중심에 봄과 여름에 일어난 사건이 존재한다. 내가 굳이 봄과 여름에 일어난 우리 현대사에 주목하는 것은 그 봄과 여름이 뜨거웠던 만큼, 그때 일어난 역사 자체가 뜨거웠고, 역사 논쟁도 뜨겁기 때문이다. 역사 해석은 각자의 몫이라지만, 역사는 정치나 정파적 목적으로 예단해서는 안 되며, 역사 앞에 겸허해야 한다. 뜨거운 폭염하에 일어난 역사와 역사 논쟁 앞에서 겸허한 마음으로 함께 읽고 싶은 시가 있다. 박노해의 《역사 앞에서》이다. 

 

 

역사 앞에서

 

박노해(1957〜 )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그 엄정함에 

자세를 가다듬곤 합니다 

역사 앞에서는 그 사람과 집단의 

처음이 나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이 처음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일제하에서 친일을 하다가 뉘우치고 

독립운동으로 생을 마감한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한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치다가 

막바지에 친일한 사람은 영영 용서받을 길이 없습니다 

 

역사는 무서운 것입니다 

당신의 사정이 어떠하든 

역사는 우리의 죽음 이후까지를 시퍼렇게 기록합니다 

오늘 현실의 승리자가 되었다고 함부로 살지 마십시오 

오늘 현실의 패배자가 되었다고 함부로 걷지 마십시오 

 

역사는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다 죽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처음이 나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이 처음을 결정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박노해 『사람만이 희망이다』 (느린 걸음)-

   

이 시를 읽으며 역사 앞에 겸허해져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남은 삶이란 것도 마음에 새긴다.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그 엄정함에/자세를 가다듬곤 합니다”라고 시인이 말했듯이, 나도 역사를 공부할수록 그 엄정함에 자세를 가다듬곤 한다. ‘벼 이삭은 익어야 고개를 숙인다’고 하듯이 역사를 공부할수록 역사를 함부로 말하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역사를 아전인수로 논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역사 앞에서는 그 사람과 집단의/처음이 나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나중이 처음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시인의 역사 이해는 평범하면서도 탁월하다. 역사를 논하는 사람들이 마음에 새겨야 하는 문구이다. 이 문구를 자기 역사를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끝맺음을 잘해야 한다는 충고로도 받아들인다. 역사에 대한 논쟁과 평가는 늘 엄정하며 그 중심에는 나중이 처음을 결정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 이해의 속성은 옳은 걸까? 한 인간이나 한 사건의 시작과 과정, 끝을 모두 살피고 평가해야 하는 것 아닐까? 

 

제2연에서는 제1연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일제하에서 친일을 하다가 뉘우치고/독립운동으로 생을 마감한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한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치다가/막바지에 친일한 사람은 영영 용서받을 길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친일 논쟁도 이 범주에 있는 것 같다.

 

육당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기초할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고 애국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뒷날 친일을 했기에 그의 모든 삶과 글은 가치를 잃었다. 시인 서정주 역시 우리 근현대사에서 대표적인 시인이지만, 뒷날 친일의 행적 때문에 오명을 벗어날 수 없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역시 친일의 흔적이 있다고 하여 애국가를 바꾸어야 한다는 논쟁이 세상을 들끓게 했다. 춘원 이광수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민주투사로 기록된 윤보선(1897〜1990)의 생애는 혼란스럽다. [이하 윤보선에 대한 이야기는 (박태균의 “꺽이지 않는, 그러나 시류에 흔들리는 야당 지도자” 『한국사 인물 열전 3』, 돌베개)를 참고한 것임] 윤보선은 임시정부의 최연소 의정원 의원이자 4.19 이후 민주당 정부에서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의 아버지 윤치소(尹致昭, 1871~1944)는 개화파의 거두이자 친일로 유명한 尹致昊(1865〜1945)의 사촌 동생으로 아산의 만석꾼이었다. 조선 선조 때 정승을 지낸 윤두수, 윤근수 형제의 후손이다. 그의 아버지는 동학농민군이 일어나자 이에 대항하고자 창의군을 조직․ 후원하였다. 윤치호는 친일했으나 윤치소는 일제 강점기 사업가로서 명망이 있었으며 친일의 행적은 뚜렷하지 않다. 윤보선의 가계는 조선 전체 그리고 구한말을 이어 현대사에까지 대단한 부와 세력을 지닌 집안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도 그 명성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윤보선과 그의 가문에 대한 평가는 빛과 그림자가 교차한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인물이었다는 평가와 친일파 가문이라는 비판이 교차한다. 정통 야당을 고수하며 독재정권에 반대하며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과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내지 못하고 군부에 정권을 넘겨준 비겁한 인물로 그려진다. 

 

일본 유학 생활을 중도에 그만두고 귀국한 윤보선은 20세가 되던 1917년 여운형과 함께 상해로 갔다. 상해에서 그는 일본에 머물던 동생을 통해 임시정부의 정치자금을 조달했고 임시정부의 최연소 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22세가 되던 해에 당숙인 윤치왕의 주선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영문학과 고고학을 공부하였고 유럽 여행을 했다. 귀국한 윤보선은 23년 동안 서울과 아산, 미니골프장까지 갖춘 함경남도 안변군에 있는 별장에 머물면서 귀족적인 은둔 생활을 했다. 그리고 8.15 광복과 함께 현실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는 초기 우익 정치세력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미군정의 ‘여당’으로 평가받았던 ‘한국민주당’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미군이 진주하자 곧바로 우익세력과 손을 잡고 한국민주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미군정청 농산국 고문으로 임명되어 활동했고, 이승만 정권 시절 「민중일보」를 운영하면서 이승만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승만과의 관계가 정치적인 기 싸움으로 좋지 않았다, 그래도 이승만이 제헌국회 의장이 되자 잠시 비서로 활동했고, 1948년 12월 서울시장에 취임했다. 

 

1954년 제3대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국회의원(종로 갑구)에 당선되었으나 주요한, 박순천 등과는 앙숙이었다. 후에 그는 한국민주당 출신 구파의 핵심 지도자로 이승만과 대립했다. 이때부터 그는 독재정권에 맞서는 민주화 투쟁 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정통 보수 야당 지도자로 자리매김했으며, 민주당 내부의 신구파 간의 진흙탕 싸움의 중심에 선 정치꾼이 되었다. 4. 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실시된 7.29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자 구파의 핵심 지도자로 내각책임제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총리인 장면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 

 

특히 주목할 것은 박정희가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였다. 어쩌면 당시 대통령 윤보선은 갈등 관계에 있는 장면을 제거하기 위해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를 묵인하였는지 모른다. 쿠데타가 일어난 다음 날인 1961년 5월 17일 아침 11시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와 미국 대리대사 그린이 윤보선을 찾아갔을 때 윤보선은 ‘국민들은 더이상 장면 내각을 믿지 않으며 헌법은 고통을 줄이지 못했고, 약속한 실업 문제는 실패했다. 부패가 매우 심각하며, 중석 수출 스캔들에 고위직들이 개입되어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초당적인 거국내각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러한 대통령의 미묘한 생각이 작용했는지 박정희는 불과 3,000여 명의 병력으로 쿠데타에 성공할 수 있었다. 

 

박정희의 민정 이양과 함께 선거전에 돌입했다. 윤보선은 민정당 단일후보로 출마했지만, 구 민주당 세력은 사분오열되어 15만 표 차이로 박정희에게 패배했다. 1965년에는 한일협정반대 투쟁으로 결집하여 신민당 후보로 다시 한 번 대통령에 출마했으나 이때는 100만 표 차이로 패배했다. 그 이후 그는 야당 지도자가 되어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는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러한 윤보선의 생애와 행적을 두고 한 쪽으로 명확하게 평가하기는 어렵다.

 

조선 시대로 가보자. 조선의 역사는 중흥의 시대도 있었으나 사화와 당쟁의 역사였다. 조선 건국 자체도 세종이 용비어천가에서 역성 역명이라 칭송하였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은 군사 쿠데타였다. 사화와 당쟁의 역사라는 것도 일제와 식민사학자들이 한국인의 역사의식을 비하하기 위해 부각시켰다는 비판도 있으나, 실제 그토록 엄청난 선비들이 요즈음 말하는 적폐 청산이란 이름으로 처형당한 일은 어느 왕조에도 없었다. 그 보복과 처형의 역사는 조선 중기 연산군 때부터 시작되어 사화를 넘어 후기의 기독교 박해까지 이어졌다.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었는가?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집권한 4년 후 무오사화(1498년)가 일어나 한창 중앙정계에서 능력을 발휘하려 했던 사림(士林)들이 처참하게 죽었다. 이때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은 묻어두어야 할 역사였지만 도굴하듯이 캐내 선비들을 도륙했다. 그 이후 갑자사화(1504년), 중종 14년에 기묘사화(1519년), 명종 즉위년에 을사사화(1545년)가 이어졌다. 모두 불안정한 왕권을 이용하여 정적을 몰아낸 사건들이었다. 

 

사화는 1589년 선조 22년 정적이었던 동인의 권력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린 엄청난 사건인 기축사화(己丑士禍)라고도 불리는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이어졌다. 이 일로 1,000여 명이 넘는 선비들이 죽어가고 뜻있는 학자와 선비들이 모두 은둔의 길을 택하여 조정은 텅 비었다. 그 중심에 대문장가 송강 정철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송강가사를 모르면 시험을 망친다. 특히 사미인곡은 님(임금)을 그리는 충심이 애절하다. 우린 이제까지 송강을 대문장가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송강은 무서운 악마였다. 그 본말을 보자. 

 

오랜 권력투쟁에서 사림파는 패배하고 처형되었으며 유배당했다. 정철의 아버지 정유침은 왕실과 사돈관계라 잘 나갔으나 을사사화에 연류되어 가족이 함경도와 전라도, 경상도로 흩어져 유배당했다. 정철은 정유침의 넷째 아들이었고 큰형은 고문으로 죽었다. 그때 정철의 나이 15세였다. 어릴 때 누나들이 왕실로 시집을 간 덕택에 궁궐을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모든 것을 누리던 아이였지만, 권력투쟁에서 집안이 몰락하면서 모든 것을 잃었다. 정철은 어린 시절부터 영민했다. 그 영민함을 나주 목사를 했던 김윤제가 알아보고 자기 정자 환벽당에서 가르쳤다. 당대의 석학들인 송순, 임억령, 김인후 등도 함께했다. 정철은 당대의 지성들에 의해 지식을 완성한 결과 11년 뒤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당당하게 중앙정계에 진출했다. 정철은 한학을 넘어 16세기에 유행한 언문 문학, 가사(歌辭)까지 모두 섭렵할 정도로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다. 그런 정철이 가슴에 비수를 품고 살았으리라는 것을 누가 알았으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인 1589년이었다. 동인이었던 정여립 모반사건이 터졌다. 이때 정철은 스스로 이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나서면서 동인을 대거 숙청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 서 ‘임금이 정철에게 옥사를 다스리게 했다. 정철이 동인은 죽이지 않으면 귀양 보내 조정이 거의 비다시피 했다’고 했다. 정철의 동인 학살극은 3년 동안 처참하게 진행되었다. 그때 3년 동안 죽은 선비만 1,000명이 넘는다. 아름다운 문장을 쓰던 학자에게 그런 잔인한 뒷면이 있을 줄이야. 정철은 동인에게 철저하게 보복했다. 

 

선조는 기가 막혔다. 정철이 그토록 잔인무도하게 선비들을 도륙 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기축옥사가 끝날 무렵 정철이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을 모조리 죽이려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다. 선조는 전교를 내렸다. “음흉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兇휘毒澈殺我良臣)”(이긍익,『연려실기술』 별집「祀典典故」 고 하면서 공식문서도 없이 정철을 강계로 유배시켰다. 고산 윤선도는 “선조는 정철을 간사한 정철(간철姦澈) 또는 독한 정철(독철 毒澈)이라 칭했고 그 자손을 독종(毒種)이라고까지 했다.”(윤선도,『고산유고』「국시소 國是疏」)고 했다. 정철은 강화도 한 농가에서 굶어 죽었다. (이상은 박종인, 『땅의 역사1』상상출판,104〜110 참고) 이러한 정철을 보면 시인이 시에서 ”처음이 나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나중이 처음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라는 말이 무색하다, 그동안은 대문장가의 면모만 강조되어왔던 탓이다. 그러나 대문장가로 알려진 정철의 최후는 그렇게 악인(惡人)으로 끝났다. 

 

조선 역사에서 또 하나 짚고 가고 싶은 게 있다. 임금에게 조(祖)와 종(宗), 군(君)을 붙이는데 그중에서 조(祖)는 엄청난 치덕(治德)을 쌓은 임금에게 붙인다. 그런데 조를 붙여서는 안 될 임금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 특히 선조와 인조를 들 수 있다. 선조와 인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나라를 초토화시켰다. 신하들의 그늘에서 자기를 보전하기 위해 엄청나게 비굴한 짓을 했다. 선조는 궁궐을 버리고 도주하다가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가려고 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피신하다가 삼전도의 치욕을 겪었다. 그런데 왜 조가 불었을까? 선조와 인조의 사후에 그들에게 조를 붙인 관료들은 모두 한패였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조를 붙여야 자기들도 전란 극복의 공을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한 사람의 역사나 한 사건의 평가에 작용하는 것이 그 가치와 정체성 그리고 지조(志操)와 삶에 대한 성찰이 있었느냐의 문제이다. 그가 인간다운 가치를 지키기 위해 살았느냐? 자기의 권력과 이익을 취하기 위해 살았느냐의 문제가 있다. 그것을 어떻게 평가할까? 여기엔 항심(恒心)과 변심(變心)의 문제가 도사린다. 항심의 문제는 초기의 선하고 정의로운 마음을 끝까지 지켜냈느냐의 문제이다. 육당이나 서정주, 이광수 등은 항심을 버렸다. 어떤 이유에서건 변심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시인의 말처럼 “한평생 독립운동에 몸 바치다가 막바지에 친일한 사람은 영영 용서받을 길이 없는” 배신자가 되었다. 

 

또 하나는 회개(悔改)와 천선(遷善)의 문제이다. 죄의 인생을 살다가 회개하여 선행으로 생을 마감하면 선인으로 자리매김을 한다. 나쁜 짓을 하다가 정의로운 일로 죽으면 의인이 된다. 성경에서도 회개하는 자는 용서하여야 한다고 했다. 예로부터 개과천선(改過遷善)은 미덕(美德)이었다. 공자는 논어 학이편에서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라 하여 잘못을 즉시 고치는 것을 군자의 덕목으로 삼았다. 그래서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일제하에서 친일을 하다가 뉘우치고 독립운동으로 생을 마감한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는” 것 같다. 

 

박정희가 구국의 일념으로 쿠데타를 했다고 하나 초기의 민정 이양과 경제발전에 주목하고 정상적으로 권력을 넘겼다면 그 의도는 인정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18년 이상 장기집권을 했고 민주주의를 바라는 수많은 사람을 억압했으며 유신독재로 최후를 마쳤기에 그의 구국의 일념은 인정받지 못한다. 

 

사람과 사건의 역사에서 그 초심이 선했다고 해도 그것은 끝맺음을 통해 평가된다. 선한 초심을 끝까지 지키며 지조를 지키고 인간다운 가치를 지켜야 선(善)이 된다. 여기에 삶에 대한 성찰의 문제가 있다. 삶에 대해 올바로 성찰하는 사람은 초심을 잃지 않고 항심을 지조로 혼(魂)을 지켜냈을 것이다. 

 

그런데 역사는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해 정치적으로 재해석되어 왔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5.16은 혁명이었고 4.19는 의거였다가 지금은 5.16쿠데타, 4.19혁명이 되었다. 5.18 광주항쟁도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폭동이었다. 6.25를 두고도 한때는 북침설까지 주장하는 무리가 있었으며, 이승만 정권을 두고도 논란이 많다. 누가 뭐래도 정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의 집권 기간 국민의 삶이 얼마나 고르게 향상되었고, 나라의 부와 기강이 얼마나 섰으며, 국방이 얼마나 튼튼해졌고 국민 화합이 얼마나 이루어졌느냐가 기본인 것 같다. 지금의 역사 논쟁도 시간이 흐르고 정권이 바뀌면 또 어떻게 해석될까? 

 

다시 시인의 충고를 되새겨 본다. 그리고 이 땅의 정치인들도 이 문구를 새기며 삶을 성찰하기를 바란다. “당신의 사정이 어떠하든/역사는 우리의 죽음 이후까지를 시퍼렇게 기록합니다/오늘 현실의 승리자가 되었다고 함부로 살지 마십시오/오늘 현실의 패배자가 되었다고 함부로 걷지 마십시오//역사는 무서운 것입니다/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다 죽는가가 더 중요합니다/처음이 나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나중이 처음을 결정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역사 앞에서》 다시 겸허해져야 하겠다. 남은 삶을 더 잘 살려고 노력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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