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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애타게 님을 그리던 《낭인의 봄》은 갔어도

이상호 | 입력 : 2020/06/18 [10:41]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올해 봄은 유달리 짧았다. 봄이 짧았다는 것은 봄의 물리적 시간이 짧았다는 것이 아니라, 봄을 느낀 정서적 시간이 짧았다는 것이다. 코로나 19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사람들과 멀어졌다. 그 멀어짐을 실천해야 코로나 19를 극복할 수 있는 올바른 시민이 된다. 그런 것을 보면 인간 행위와 의식의 모든 패턴과 가치는 사회적 상황과 결부된다는 것을 느낀다.

 

봄은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계절이다. 겨우내 만나지 못한 님이 그립고 떠나보낸 님이 애절하다. 산과 들에 피어나는 꽃들을 보면 그리움은 더 커진다. 방자하게 피어난 벚꽃을 보면 애태웠던 첫사랑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데 그 봄이 느낄 사이도 없이 가버렸다. 

 

코로나 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봄의 대부분을 집 안에서 보내게 했다. 그러니 몸은 집 안에 있고 마음은 온갖 상상의 날개를 펴면서 세상을 떠도는 나그네가 되었다. 나는 지금 태양이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서 떠나보낸 봄을 아쉬워한다. 봄이 주는 그리움, 봄이 주는 기다림, 봄이 주는 사랑의 감정을 떠 올린다. 나의 봄은 몸은 방 안에 있으면서 마음만 쓸쓸히 추억의 언덕을 거닐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김소월의 《낭인의 봄》처럼 누군가를 한없이 그리워했다.

 

 

낭인의 봄 

김소월(1902〜1934)

 

 

휘둘리 산을 넘고/굽이진 물을 건너 

푸른 풀 붉은 꽃에/ 길 걷기 시름(愁)이여 

 

잎 누른 시닥나무/철 이른 푸른 버들 

해 벌써 석양인데/불슷는 바람이여 

 

골짜기 이는 연기/뫼 틈에 잠기는데 

산 모루 도는 손의/슬지는 그림자여 

 

산길 가의 외론 주막/어이그, 쓸쓸한데 

먼저 든 짐장샤의/곤한 말 한소리여 

 

지는 해 그림자니/오늘은 어디까지 

어둔 뒤 아무데나/가다가 묵을레라 

 

풀숲에 물김 뜨고 /달빛에 새 놀래는 

고운 봄 야반에도/ 내 사람 생각이어

  

이 시는 1920년 2월 김소월이 배재고보 시절 스승 김억(金億)의 추천으로 창조(創造) 5호에 실린 것으로, 김소월을 문단에 등단하게 한 시라 전한다. 이 시는 고향의 산촌이 무대이며 시의 화자는 정처 없이 떠도는 자신을 낭인(浪人)에 비유하고 있다. 이 시를 읽다 보면 두 가지 영상(映像)에 사로잡힌다. 하나는 시 자체가 언어로 표현된 하나의 풍경화이다. 그것도 고향 산골의 풍경화이다. 그리고 하나는 떠나버린 ‘님’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과 상실의 아픔이 그려진다.

 

“휘둘리 산을 넘고/굽이진 물을 건너//푸른 풀 붉은 꽃에/ 길 걷기 시름(愁)이여”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떨까? 높지 않은 겹겹의 산과 굽이진 강물을 걷고 건너는 나그네, 지친 나그네의 표정은 시름에 가득하리라.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문명이 개입되지 않은 풍경이다. 여행 중에 이런 풍경을 보면 그곳에 쉬면서 한없이 바라보고 싶어진다. 휘둘리 산을 넘었으니 그리 높은 산은 아니었으리라. 굽이진 물을 건넜으니 그리 크지 않은 내(川)였으리라. 그러나 빠른 걸음이었으리라. 갈 길이 멀었나 보다. 걷는 길 따라 푸른 풀이 무성하고 꽃은 피어 붉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그네의 마음은 그리움에 젖는다. 오래 걸었으니 몸이 피곤하다. 마음은 더 피곤하다. 우수(憂愁)가 가득하다.

 

문득 고개 들어 옆을 보니 시닥나무의 잎이 누르고, 철 이른 푸른 버들이 눈앞에 들어온다. 아직 무르익지 않은 초봄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벌써 석양으로 향하고 불쑥 바람이 불어온다. 나그네는 잠시 서서 이마에 땀을 훔치며 숨을 몰아쉬고 사방을 둘러본다. “골짜기 이는 연기/뫼 틈에 잠기는데//산 모루 도는 손의/슬지는 그림자여” 절묘한 표현이다. 골짜기에 피어오르는 연기가 겹겹의 산 틈(계곡, 구릉)에 자욱하다. 도시의 냄새가 전혀 없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나그네 홀로 산모퉁이 돌아드는데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쓸쓸하다. 

 

문득 보니 산길 가에 주막이 보인다. ‘외론 주막’이니 다른 집이라곤 없다.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어이그, 쓸쓸한데” 나그네의 마음도 쓸쓸한데 주막도 쓸쓸하니 쓸쓸함은 배가 되었다. 그 와중에 주막에 먼저 든 짐 장사가 한마디 한다. ‘휴우우...어휴 힘들어’ 피곤한 말소리를 한다. 그 말까지 시인의 마음을 피곤하고 외롭게 한다.

 

“지는 해 그림자니/오늘은 어디까지” 정처 없는 나그네에게 어디서 자고 가면 어떠하랴. 좀 더 걸어가자. 가다가 어두워지면 아무 곳이나 묵으리라. 나그네는 날이 저물어도 걷고 또 걷는다. “풀숲에 물김 뜨고 /달빛에 새 놀래는//고운 봄 야반”이니 밤은 깊어간다. 걷는 밤길, 풀숲에는 밤안개(물김)가 피어오르고 달빛이 그윽하다. 그윽한 달빛에 새도 놀래니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니 고운 야반이다. 그런데 말이다. 밤안개 그윽한 달빛 아래를 걷는 그 고운 야반에도 나그네의 마음에 오로지 한 사람, 그립고 그리운 ‘내 사람 생각’뿐이다. 낭인의 밤길은 그렇게 저물어 가고, 그렇게 쓸쓸하고 고독하다. 또 그렇게 그립고 애절하다. 

 

사랑에 깊이 빠져 본 사람은 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은 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간 거리를 걸어본 사람은 안다. 그 거리를 아무리 걸어도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 밤의 깊이와 가로등의 불빛도 무색하다. 행인의 말소리와 자동차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직 마음과 머릿속에는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뿐이다. 나는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는가? 존재의 혼돈을 느낀다.

 

김소월의 모든 시에서 ‘님’은 ‘상실의 님’이다. 《낭인의 봄》에서도 화자는 나그네가 되어 깊은 밤, 산길을 걸으면서도 달빛 아래서 오로지 떠나버린 님인 ‘내 사람 생각’만 하고 있다. 떠나간 님, 상실한 님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 상실된 님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이는 어린 시절 첫사랑의 동네 처자라고 하지만 그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 어떤 이는 잃어버린 조국이라고 하나 그것 또한 비약인 것 같다. 

 

왜 낭인이 되었는가? 님을 잃어버렸기에 낭인이 되었을 수도 있고 다른 이유에서 낭인이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낭인의 신세에서도 님에 대한 그리움은 어찌할 수 없다. 깊은 밤 산길을 걷는 달빛 아래서도 떠나지 않는다. 마음으로는 결코 님을 떠나보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님은 되돌아오지도 않는다. 그러나 원망은 없다. 오히려 떠나버린 님을 걱정하고 잘 떠날 수 있기를 빌어준다. 소월에게서 님은 아픔이며 영원한 부재의 님이다. 상실의 원형이며 존재의 허무이다. 그리고 상실은 승화로 나아간다.

 

시에서 낭인이 처한 시간은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로 보아 초봄의 일몰과 그 이후의 시간이다.

 

일몰 자체도 일종의 상실이며 공허이다. 햇살(?)을 잃고 노을이 사라진 하늘은 공허하고 두렵기도 하다. 해가 지고 어둠이 밀려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바빠지게 하고 서두르게 한다. 더 잃을 것이 무엇인가? 안식을 취하고 싶어진다. 공허에서 안식을 원하면서도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면서 밤을 받아들인다. 시에서 석양과 산그늘, 밤안개와 달빛, 외론 주막과 짐장사의 곤한 소리는 님을 상실한 낭인에게 아픔과 곤함을 더한다. 그러나 낭인은 그대로 걷는다. 그것은 상실을 승화하고자 하는 구도의 길인지 모른다. 

 

상실은 아픔의 과정을 거쳐 비애에 빠지게도 하고 승화되기도 한다. 상실의 승화는 새로운 존재의 발견이다. 이 시에서는 상실의 아픔을 간직하고 낭인이 되어 정처없이 떠도는 자기 존재의 허무에 대한 짙은 슬픔과 우수만 그려진다. 그러나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흐름으로 봐서 《낭인의 봄》은 님의 상실을 승화시켜 가는 중이다. 어쩌면 《낭인의 봄》은 님을 상실한 자가 걷는 구도의 길인지 모른다. 그 길에서 상실자는 험한 삶을 달래며 존재의 이유를 찾는지도 모른다.

 

존 스튜어트 밀은 젊은 날 핼리엇 테일러를 깊이 사랑했다. 그러나 핼리엇은 아이가 둘이나 있는 유부녀였기에 밀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도 밀은 핼리엇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일관했기에 이 삼각관계에 어떤 추문도 낳지 않았다. 매사에 핼리엇을 존중하고 지켜 주었다. 둘의 정신적 사랑은 20년 이상 지속되었다. 그리고 둘은 핼리엇의 남편이 죽고 2년 뒤에 결혼했다. 그러나 아내 핼리엇은 결혼 생활 7년 만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후 밀은 핼리엇만 그리워하며 살다가 죽었다. 《접시꽃 당신》 못지 않은 진한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님을 잃어버린 사람은 정도에 차이가 있지 모두 “낭인”이 될 수밖에 없다. 

 

이별과 상실의 아픔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상실로 인해 존재의 허무를 느낀다. 그러나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이 있듯이 상실의 아픔을 통해 인생과 사랑의 의미를 찾고 성숙해 간다. 그것은 상실의 승화이며 존재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거기에는 상실의 아픔에 대한 회고와 깊은 성찰이 있기 때문이며 사랑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승화의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 봄도 나에겐 《낭인의 봄》이었던 것 같다. 코로나 19가 득세하는 가운데 고향 언덕에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님(어머니)을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었다. 세상 모든 사람도 그랬으리라. 《낭인의 봄》은 갔어도 그리움은 남는다. 그러나 우린 그 상실에 대한 아픔이 있기에 승화의 에너지로 또 다른 구도의 길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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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승현 2020/06/18 [13:41] 수정 | 삭제
  • 낭인의 봄은 제가 정말 좋아하는 시인데, 다시금 그 감동을 느낄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랑에 아파본 사람, 즉 "낭인"이 되어야만 다시 사랑할 수 있음을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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