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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 된 《사슴》의 사연

이상호 | 입력 : 2020/07/09 [17:11]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신념이 굳고 곧은 한 지인이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가 국회로 가기 전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소신에 찬 그는 혼이 있는 의정활동을 하겠다고 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국회의원으로서 오래 버티려면 의원님의 혼을 반쯤은 당과 대표에게 저당 잡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오래 살아남기 힘들 것입니다.” 

 

그는 의정활동 중 쓴소리를 하며 개인의 소신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는 차기 선거에 공천을 받지 못했다. 국회의원을 마무리할 때 만난 그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혼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임명직 단체장이 된 한 지인이 민원에 휩싸였다. 민원은 임명권자의 정책 때문이었다. 그 정책은 그의 소신과도 다른 것이었다. 그는 민원 방어에만 집중했다. 우연한 기회에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왜 임명권자에게 소신이 깃든 직언을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는 “저는 혼이 없습니다.”고 말했다. 

 

사무관 승진을 한 후배와 대화를 했다. 열심히 하겠다는 그에게 나는 말했다. ‘우선 당신의 혼은 금고에 저장해 놓고 임명권자의 혼을 당신의 혼으로 받아들이세요. 생각의 유연성을 가져요. 그리고 열심히 하십시오.’ 나중에 그 후배는 서기관 이상의 승진을 하고 퇴임했다. 

 

공수처법 투표에서 당론과 달리 기권을 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은 금태섭 전 의원이 그 부당성을 주장하지만, 징계를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해찬 대표는 강제적 당론이라며 징계의 정당성을 계속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징계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국회의원과 전문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국회의원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헌법기관이며, 강제적 당론이라는 이유로 국회의원의 선택을 강제하는 것은 민주주의, 특히 정당 민주주의에도 어긋난다. 헌법에도 국회의원 양심의 자유가 명시돼 있으며 국회법 114조 2항에도 나와 있다. 아무리 당헌당규가 중요해도 헌법이나 국회법보다는 하위 법령이다. 이건 당론을 떠나 헌법 정신을 존중하느냐 않느냐의 문제로 보인다.’ 금태섭 전 의원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다가 정치인으로서의 생명이 끝날 위기에 처해 있다. 

 

내 편일 것이라 믿고 임명했던 윤석열 검찰총장이 정권의 구미에 맞지 않자 청와대와 여당이 계속 흔들어대다가 이제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15년 만에 검찰총장 수사지휘권까지 발동하며 압박하고 있다. 윤 총장은 장고에 들어갔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런 일련의 이야기들은 대한민국에서 “자기 혼”을 가지고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해 준다. 이렇게 혼을 지키기 힘든 세상에서 떠오르는 시가 있다. 노천명의 《사슴》이다. 

 

 

사 슴

 

노천명(1911〜1957)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곤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산을 쳐다본다 

 

― 노천명, 「산호림」 (1938)-

  

이 시는 1938년 노천명의 첫 시집 「산호림」에 실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훗날 사람들은 시가 지닌 자아상보다 자기 마음을 《사슴》에 비유하여 연인에게 보내는 애절한 사랑 편지에 이 시를 애용했다. 사슴을 의인화하여 고고하게 살고자 하나 용납하지 않는 삶의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읊고 있다. 현실에 타협하고 있으나 정신만은 고고함을 잃지 않고 정신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도도함이 서려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노천명은 1942년 친일문화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 가입하여 태평양 전쟁을 찬양하고, 젊은이들에게 전쟁터에 나갈 것을 권유하는 선동적인 글을 발표하여 친일 문인이 되었다. 정치에 물들지 않고 고고하게 살고자 했던 노천명은 모윤숙, 최정희 등과 함께 친일 정치 선동에 앞장서서 친일파로 낙인되었다. 그래서 《사슴》은 “혼”을 지키며 고고하게 살기로 작정하고 세상에 천명했으나 현실이란 강한 벽 앞에서 무너진 지식인의 슬픈 자화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선 노천명의 친일행적이나 삶에 대한 논의는 접고 단지 《사슴》에서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에만 집중하려고 한다. 

 

시는 총 2연 8행으로 구성되었다. 형식이 매우 정제되어 깔끔하고 세련미가 있어 균형감각과 조화미를 갖춘 시라고 평가받아왔다. 시에서 사슴은 시인의 감정이 투입된 자신인지 모른다. 

 

1연의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관(冠)이 향기로운 너는/무척 높은 족속이었나보다.”에는 사슴의 외모에 대한 묘사와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투입되어 있다. 여기서 사슴의 이미지는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 ‘향기로운 관(冠)’을 지닌 높은 족속이다. ‘향기로운 관’을 지닌 ‘높은 족속’의 고고함을 지키려 하나 지키지 못하고 목만 길게 빼고 ‘먼데 산’을 바라보는 슬픈 모습이다. 그래서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과 ‘향기로운 관’은 존재에 대한 내면의 갈등이다. 지조를 지키며 살기로 작정하였지만 현실 앞에 무너져 버린 나약한 모습을 드러낸 자신의 운명적 모순성을 드러낸 것이라 할까? 

 

이 갈등과 모순은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본다”는 2연에서 심화 된다. 여기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시간적 상상과 아픈 현실에서 마음의 위안을 찾고자 하는 존재의 간절함이 녹아 있다. 

 

시에 표현된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 ‘ 관이 향기로운 높은 족속’ ‘물’ ‘잃었던 전설’ ‘어찌할 수 없는 향수’ ‘먼 데 산’을 중심으로 시를 더 음미해 본다. 우선 시(詩)속의 사슴은 어디에 있을까? 

 

시에서 사슴은 ‘먼데 산’을 바라보는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다. 그렇다면 사슴은 산속 높은 봉우리에 있지 않다. 평지에 있으며 갇혀 있다. 어느 날 시인은 동물원에 간 것 같다. 거기가 일제가 ‘창경궁’ 자리에 만든 ‘창경원’인지 모를 일이다. 동물원 사슴은 모가지를 길게 빼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본 시인은 그런 사슴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했는지 모른다. 또 그런 사슴에게서 일제의 폭압과 문명의 울안에 갇힌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을 발견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동물원에 갔다면 사자, 호랑이, 공작 등의 동물 중에 왜 하필 사슴에 감정이 꽂혔을까? 사슴은 기린과 함께 상스러운 동물로 선비 중심의 유학문화에서 나약하지만 고고하고 오래 사는 동물이다. 그래서 사슴은 십장생의 하나로 남을 해치지 않는 청아한 존재였다. 선비 집안에는 사슴이 그려진 십장생 병풍이 있었고 일반 가정에서도 사슴이 수놓아져 있는 베갯모나 이불 깃을 사용하기도 했다. 사슴은 전통과 혼을 지키려는 선비의 고고함이다. 

 

십장생은 장수한다고 알려진 해, 산, 물, 돌, 소나무(또는 대나무), 구름(또는 달), 불로초(영지), 거북, 학, 사슴 등 10가지이다. 여기에는 동양적인 자연 숭배 사상이 담겨 있다. 십장생도에는 볼로초를 입에 물고 먼데 산을 보는 사슴. 평화롭게 풀을 뜯는 사슴, 물가에서 거북과 평화롭게 지내는 사슴이 보인다. 십장생에 등장하는 거북, 학, 사슴은 짐승 중에서 힘없는 존재이지만 귀하고 신령한 동물, 장수의 상징으로 대접받는다. 왜 그럴까? 

 

십장생을 해석하는 견해에 의하면, 사슴, 학, 거북 등은 물이 부드럽지만 강하듯이 나약하지만 강하고 오래간다는 도교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십장생의 짐승 모두 목이 길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사자나 호랑이 같은 강한 동물은 목이 굵고 짧다. 그러나 나약한 동물인 기린, 사슴, 학, 거북(거북도 사실은 목을 숨기고 있으나 빼면 길고 가늘다) 등은 목이 길고 가늘다. 십장생에 이 동물들을 포함시킨 것은 무슨 연유일까? 

 

나약한 것은 목이 길다. 왜 길까? 생존을 위해 목을 길게 빼고 먼 곳을 바라보며 위기를 빨리 감지하고 피해야 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선비문화에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목이 긴 것은 이상의 세계를 추구하고 고고하며 지조를 지키는 것으로 보았다. 나약하지만 강하고, 오래 견딜 수 있다는 선비문화의 역설이 아닐까? 그러나 약한 것은 강자가 나타나면 숨고 움츠릴 수밖에 없다. 선비문화가 한편에선 은둔의 문화가 된 것도 그런 연유일까? 

 

시에서 사슴은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 ‘ 관이 향기로운 높은 족속’이다. ‘목’이 아니라 ‘모가지’이다. 왜 하필 ‘모가지’라 했을까? ‘모가지’는 ‘목’의 속어이다. ‘네 모가지가 몇 개냐’라는 말이 있듯이 모가지에는 생명의 위급함이 들어 있다. 그것은 생명을 목숨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목숨, 모가지 등의 우리말에는 생명의 위태함이 도사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서정주가 그의 시 《행진곡》에서 “모가지여 모가지여 모가지여 모가지여”라며 외쳤듯이 ‘모가지’에는 위태한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긴박성이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모가지’는 목숨과 일체성을 지니며, ‘모가지’를 길게 뺀 모습은 생존을 향한 갈구일 수 있다. 

 

그러나 목이 긴 동물은 나약하다. 강자가 나타나면 피해야 하고 매사에 사방을 주시하며 살펴야 한다. 강한 동물은 공격하여 목이 긴 동물의 목부터 물어 질식시킨다. 그래서 한시도 방심하면 안 된다. 평화롭게 먹이를 먹다가도 수시로 사방을 살펴야 하고 새끼를 품다가도 수시로 모가지를 길게 빼고 살펴야 한다. 그래야 모가지를 지켜 자기 종과 정체성을 지킬 수 있다. 사슴은 목이 긴 것이 정체성이나 생존의 위협에 늘 노출되어 있으니 슬픈 정체성이다. 

 

그러나 선비문화에선 사슴의 그 나약함을 뿔의 화려함으로 고고하게 해석했다. “관이 향기로운 너는”에서 관은 사슴의 뿔에 대한 은유이며 높은 긍지와 자존심의 상징이다. “높은 족속”은 고고한 자아와 귀족성을 드러낸다. 그래서 선비문화에선 고귀한 혼을 지키고 이상의 세계를 추구하는 동물로 뿔을 가진 긴 목의 사슴을 생각했던 것 같다. 목이 긴 사슴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이상적이며 육체적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것에 집착하는 모습이다. 이 역시 선비문화의 역설이며 자기 위안이 아닐까? 

 

그러나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에서와 같이 그런 높은 족속은 과거의 모습이다. 현재는 높은 족속이 아니다. 지위도 빼앗기고 노닐던 동산도 잃어버렸다. 자기의 정체성과 혼도 저당 잡히고 현실은 구속되어 있다. 그것은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본다”는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구속상태의 사슴은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면서 잃었던 자기 모습을 발견한다. 물은 자기발견의 매개체이다.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낸다. 잃었던 전설이 무엇일까? 근원적인 정체성일 수 있고 지조와 고고함을 지닌 혼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의 자기에게 없다. ‘먼데 산’에 있다. ‘먼데 산’에 그 모든 것을 두고 강제화되어 이곳에 왔다. 그래서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빠진다. 향수는 잃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잃었던 정체성과 혼에 대한 갈구이다. “어찌할 수 없는 향수”이니 자기의 의지로 돌아갈 수도 찾아올 수도 없다. 그래서 사슴은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본다” 한없이 나약하다. 실존이 상실된 모습이다. 

 

‘먼 데 산’은 어디일까? 태초에 뛰놀며 마음껏 자유를 펼치던 사슴의 고향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고향일 뿐 아니라 정신적인 고향이며 혼을 가지고 살던 곳이다. 여기서 ‘먼 데’라는 말속에는 깊은 슬픔이 있다. 눈으로는 ‘먼데 산’이 보이지만 몸은 갈 수 없는 ‘먼 곳’이다. 물리적인 거리보다 심리적인 거리가 너무 멀다. 나는 여기 있으나 진정한 존재가 아니다. 나의 실존을 위해선 ‘먼데 산’에 가야 한다. 그러나 갈 수 없다. 그래서 모가지만 긴 슬픈 짐승이 되었다.

 

그래도 한가지 희망이 있다. 사슴뿔은 해마다 떨어져 나가도 다시 돋아난다. 사슴 농장을 하는 사람들은 매년 사슴뿔을 자른다. 피를 뽑아 팔고 뿔도 판다. 그러면 다음 해에 또 그만큼 돋아난다. 사슴의 향기로운 뿔은 재생을 의미한다. 옛날 임금이나 권력자들이 사슴뿔 모양의 왕관을 쓴 것도 그 재생의 신비성 때문일까? 재생을 통한 권력의 영원성 추구일까? 뿔의 그 화려한 위엄 때문일까? 비록 우리에 갇힌 사슴 신세지만 혼을 찾고 지킬 수 있는 재생의 희망이 있다는 것일까? 

 

이 시는 동물원에 갇힌 사슴의 무력한 모습이다. 무력한 사슴은 단지 고향을 그리워할 뿐이며 고귀한 정신과 혼의 세계를 회고할 뿐이다. 동물원에 갇힌 사슴은 누구일까? 일제라는 폭압에 갇혀 그들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조선의 지식인들일까? 권력 앞에서 혼을 내던진 슬픈 지식인의 모습일까? 아니면 스스로 혼을 던지고 친일과 권력의 세계로 뛰어든 권력의 불나방들일까? 문명과 자본, 권력의 틀에 갇혀 자연성과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심지어는 정신과 고귀한 영혼마저 저당 잡히는 나약한 관료들의 모습일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나의 정체성과 혼을 지키며 살기가 쉽지 않다. 현실이란 틀과 권력적 위협이 나를 위협한다. 생존하려면 타협해야 하고 나의 혼을 금고에 두어야 한다. 그렇지않으면 유관순이나 안중근, 이육사나 윤동주처럼 영어의 몸이 되어 싸늘하게 살다 가야 한다. 그러나 역사는 싸늘하지만, 혼을 지키며 살아간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정체성과 혼을 지켜왔다.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 된 《사슴》은 자본과 욕망, 권력과 문명의 틀에 갇혀 혼을 지키고 살아가기 힘든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자 혼이 있는 참 존재를 갈망하는 존재의 갈등이기도 하다. 죽을지언정 혼을 지키는 것이 옳은가? 생존을 위해 혼을 저당 잡히고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가?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오늘을 사는 사람들도 혼을 지키며 살기는 쉽지 않다. 

 

강제화되어 타협하더라도 한가지 희망이 있다. 사슴이 모든 것을 잃고 갇혀 있지만 ‘먼데 산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이 있는 한, ‘향기로운 관’이 매년 다시 돋아나는 한, 잃었던 정신은 영원히 재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노천명의 《사슴》에서 오늘도 그 당시나 지금이나 혼을 지키며 살아가기 힘든 세상과 그것을 강제화하는 현실적 상황 속에서의 갈등과 존재의 희구를 본다. 그러나 혼이 사라진 나는 이미 내가 아님도 깨달아야 한다. 존재하는 것은 참 존재를 위해 늘 갈등한다. 그 갈등은 단지 바라봄과 갈망을 떠나 깊은 성찰과 결단을 통해 참된 길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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