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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플라스틱 빨대》처럼 하찮은 것들도

이상호 | 입력 : 2020/08/14 [13:42]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뉴스파고=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이상호] 코로나 19 이후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 사용이 부쩍 늘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 코로나 19 이후 부쩍 늘어난 배달음식 때문이었다. 코로나19가 배달문화를 급속하게 발달시켰다. 가족끼리도 친구끼리도 음식점에 가서 식사하는 대신 집에서 배달시켜 먹는 일이 늘었다. 그러다 보니 음식점들도 앞다투어 배달 판매를 하고 있다. 

 

코로나19는 인터넷 쇼핑도 증가시켰다. 코로나19는 오프라인 문화를 온라인 문화로 급속히 변화시키고 있다. 대형 유통기관들도 인터넷 판매를 강화하고 있다. 음식 배달이든, 생활용품 인터넷 쇼핑이든, 배달 판매를 위해서는 플라스틱 용기와 비닐봉지, 스티로폴 박스 사용이 거의 필수적이다. 그러다 보니 플라스틱과 비닐 사용량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배달 포장지의 뒤처리는 더욱 중요하다. 

 

아파트 쓰레기 분리수거장을 보면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배달용품을 포장한 플라스틱과 스티로풀 박스 등이 늘었다. 어떤 이들은 잘 손질하여 버리지만 어떤 이들은 마구 버린다. 마구 버린 플라스틱 용기 등은 지구와 사람에게 환경재앙으로 되돌아온다. 

 

49일이 넘는 긴 장마와 폭우는 산사태와 침수 피해 등만 가져온 것이 아니라 전국 곳곳을 쓰레기 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쓰레기는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고 폭우가 쏟아지면 또 쌓여간다. 그것들을 보다 보면 저 많은 쓰레기가 어디서 나왔을까? 의심이 든다. 

 

그것은 상당 부분 인간이 만든 재앙이다. 쓰레기라고 잘 정리하여 치우지 않고 함부로 버렸던 안일함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늦었지만, 쓰레기에 대하여 생각을 바꿔야 할 중대한 시점에 서 있다. 비록 하찮은 플라스틱 빨대지만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된다. 신미균의 시 《플라스틱 빨대》를 다시 읽는다. 

 

플라스틱 빨대         

신미균(1955〜 )

 

고작, 몸통 하나로 뒹굴고 있는

화려한 색깔도 아닌 허연 빨대 

속까지 텅 비어 있어 

마음대로 꺾고 접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생각했는데 

이것도 꺾어 접어놓으니 

슬그머니 일어나며 

반쯤 펴진다 

세상에, 

네 까짓 게

하다가

속이 빈 나도

누군가 쉽게 보고

꺾고 접어 

버리려 할 것 같아 

꺾이고 접혀 상처 난 그를 

곱게 곱게 펴 주었다.

 

-<신미균 『웃기는 짬뽕』,푸른 사상, 2015>-

 

플라스틱 빨대는 진짜 일회용품이다. 두 번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플라스틱 빨대는 진짜 형편없는 물건이다. 곳곳에 버려져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려 왔다. 사용하기가 편할 뿐 아니라 버리기도 편하다.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플라스틱 빨대는 ‘고작, 왜소한 몸통 하나로 뒹굴고’ 볼품없다. 가늘고 속까지 비어 있어 마음대로 접고 꺾을 수 있다. 우린 그것들을 하찮게 여긴다. 시인도 그랬다. 그래서 “네 까짓게” 하며 경멸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빨대는 잡초처럼 밟아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일어난다.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존재로서의 어떤 구실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것을 본 시인은 깨닫는다. 남이 보면 나는 어떤 존재랴. 남의 눈에 나도 “네 까짓 게”라 부를 만큼 하찮은 존재가 아닐까? 돌아보니 결국 나도 속이 비었다. 별것 아니다. 그래서 나를 깔본 남도 나를 플라스틱 빨대처럼 “쉽게 보고 꺾고 접어 버리려 할 것” 같다. 그래서 시인은 마음을 고쳐먹는다. “꺾이고 접혀 상처 난 그를 곱게 곱게 펴준다.” “내가 타인을 보는 만큼 타인도 나를 본다.”는 진리의 깨달음이다. 세상 속에 비칠 자화상의 발견과 성찰이다. 

 

시는 하찮은 플라스틱 빨대를 통해 우리에게 몇 가지 메시지를 전한다. 첫째는 자아에 대한 성찰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은 대단하게 여기면서 남은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자기는 잘 안다고 여기면서 남은 잘 모른다고 여기는 경향도 있다. 그래서 남 앞에서 자꾸 가르치려 하고 설교하려 한다. 남의 잘못은 적나라하게 비판하면서 자기는 돌아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타인을 무시하고 가볍게 대하기 쉽다. 그러나 돌아보라. 나도 남이 보기엔 그렇다. 플라스틱 빨대처럼 속이 비고 하찮은 존재에 불과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린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는 존재의 윤리에 대한 깨달음이다. 쓸모없이 보이는 플라스틱 빨대도 존재의 가치가 있다. 나에겐 쓸모없는 것이지만 어딘가에 쓸모가 있다. 그것이 쓸모를 인정받지 못하면 거북이 배속 같은 엉뚱한 곳에서 존재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존중받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타인을 존중해야 한다.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마태복음 7장 12절) 는 세상 사는 이치를 전하고 있다. 나의 존재는 너의 존재가 있기에 존재의 가치가 있다. 내가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타인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논어(論語)》〈위령공편(衛靈公篇)〉에서 공자가 말한 「기소물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말을 새겨야 한다. 그래야 나의 존재도 소중하게 인정받을 수 있다. 

 

셋째는 존재하는 모든 종(種)에 대한 이해이다. 모든 종(種)은 그것이 인간에게 유익한 것일 수 있고 해로운 것일 수 있지만, 나름의 존재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오늘 유익(有益)한 것이 내일 유해(有害)한 것일 수 있고, 오늘 유해한 것이 내일 유익한 것이 될 수 있다. 플라스틱 빨대는 인간이 만들어낸 존재이다. 그것이 때로는 유익했는데 필요 없다고 버렸더니 유해한 존재로 되돌아왔다. 환경 오염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그 종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관리하느냐의 문제이다. 그래서 인간은 지혜로 모든 종을 인간에게 유익하게 만들고 유익하지 못한 종들은 잘 다스려야 한다. 

 

신은 인간을 모든 종 중에서 가장 우월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러나 신은 우월함을 줌과 동시에 겸허함을 가질 것을 강조했다. 만약 인간이 우월함만 믿고 겸허함을 잃어 다른 종들을 함부로 취급하면 그 대가를 치르게 했다. 그런데 인간은 평소에는 그것을 전혀 모르거나 잊고 살아간다. 그러다가 사건이 일어나면 일시적으로 깨닫고 자숙하다가 다시금 잊고 우월함에 빠지곤 한다. 지속적인 환경 재앙과 플라스틱과 같은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지혜는 우월함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겸허함에서 생겨나는 것인데, 인간은 지혜를 우월함의 선물이라고 착각한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했듯이, 세상에 비친 나도 누군가 ‘네 까짓 게’라고 함부로 짓밟을 수 있음을 깨달을 때 겸허하게 자아를 성찰하고 지혜로워질 수 있다. 

 

넷째는 약자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다. 세상에 약자는 늘 함부로 취급받기 쉽다. 그러나 그 약자는 약자이기 때문에 또한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흔히 신분이 낮고 힘없는 백성을 민초(民草)라 한다. 민초(民草)는 사람을 잡초에 비유한 말이다. 그러나 잡초가 짓밟아도 고개를 들고 다시 일어나 그 생명을 유지하며 종을 이어가듯이, 민초도 온갖 핍박과 짓밟힘에서도 삶을 유지하며 생명력을 발휘해 왔다. 예초기로 풀을 깎아 본 사람들은 안다. 길가에서 짓밟힌 잡초들일수록 깎기 위해 예초기를 들이대면 드러누웠다 일어난다. 질기다. 예초기의 그 강한 칼날에도 잘 잘리지 않는다. 그래서 우린 플라스틱 빨대처럼 하찮은 것들이 오히려 더 강한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함부로 버리거나 대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약자들, 하찮은 것들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발휘하는 일은 중요하다. 시인이 마지막 연에서 “꺾이고 접혀 상처 난 그를/ 곱게 곱게 펴 주었다.”는 것은 바로 이 측은지심의 발휘이다. 그 측은지심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발휘해야 하는 인간의 미덕이다. 약자들에 대한 가장 인간다운 배려의 마음이다.

 

다섯째는 버려지는 것들에 대한 재인식이다. 다시 말하지만,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존재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나에겐 쓸모가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쓸모가 있을 수 있으며, 지금은 쓸모가 없지만, 나중엔 쓸모가 있기도 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만약 그것들이 존재의 이유를 갖지 못하고 함부로 버려질 때 어딘가에서 존재의 위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플라스틱 빨대는 거북이 입속으로, 고래의 입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배에서 존재의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렇다고 버리지 말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버리되 함부로 버리지 말고 잘 버려야 한다. 버리는 것을 잘 버리는 것은 그 존재에 대한 존중임과 동시에 버리는 질서를 구축하는 길이다.

 

수년 전에 충북 지방에 올해처럼 폭우로 홍수가 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아내와 호수나 바닷가를 드라이브하며 산책하기를 즐겼다. 그때도 호수를 보고 싶어 충주호에 갔다. 그런데 그때 충주호는 홍수로 떠내려온 쓰레기로 온통 덮혀 있었다. 호수 전체에 띠를 두르고 쓰레기를 수거하고 있었다. 배와 장비들을 동원하여 수거한 쓰레기더미는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 쓰레기 더미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플라스틱 용품을 포함한 온갖 생활용품에서부터 산에서 떠내려온 나뭇가지 등이 주를 이루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인재(人災)였다. 그것들이 떠내려오면서 물길을 막아 산사태나 제방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때 나와 아내는 충주호에서 나는 악취로 견딜 수가 없어 바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홍수나 산사태 등을 막으려면 쓰레기를 잘 치워야 한다’고 수시로 말한다.

 

산에서 벌목을 하고 그 잔해를 잘 버리지 않고 함부로 내버려 두었을 때 비가 많이 오면 물길을 막아 산사태를 유발할 수 있다. 동네 곳곳에 함부로 버려진 쓰레기들은 비가 많이 오면 떠내려가 내(川)와 강(江)의 물길을 막아 둑을 무너뜨릴 수 있다. 함부로 취급하고 버려지는 것들일수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엉뚱한 역할을 한다. 인간도 함부로 취급받고, 핍박받고 소외되면 이상한 성격과 행동을 통해 타인과 사회에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래서 우린 쓸모없는 것, 약한 것, 보잘것없는 것들도 ‘네 까짓 게’하고 함부로 버리지 말고, 잘 정리 정돈하여 버려야 한다.

 

신미균의 시 《플라스틱 빨대》를 통해 나는 자아의 성찰과 함께 모든 종의 존재를 존중하며 겸허해져야 한다는 존재의 윤리에 대한 깨달음과 존재하는 모든 종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더 겸허한 자세로 약자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며 측은지심을 가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것 같았다. 특히 모든 존재는 그 나름의 존재의 가치를 발휘하므로 버리는 것들도 잘 정리 정돈하여 버림으로써 그것들이 엉뚱한 곳에서 존재의 위력을 발휘하여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활지침을 다시 새기게 해주었다.

 

이번 폭우로 인한 재난을 보면서 《플라스틱 빨대》처럼 하찮은 것들도 함부로 버리면 큰 재앙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다시 깨닫는다. 분명한 것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함부로 취급하고 함부로 버리면 반드시 그 대가를 아픔으로 받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폭우나 폭설로 인한 재해의 상당 부분은 인재(人災)이다. 인간은 더 겸허해지고 더 정돈된 삶을 살아야 한다. 모든 존재를 존중하며 약자에 대한 배려도 더 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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