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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대추 한 알》이 붉어지기까지는?

이상호 | 입력 : 2020/11/28 [18:35]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어릴 때 고향 집 울안에 대추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매년 대추가 주렁주렁 열렸다. 잘 익은 것은 제사상에 올랐다. 나머지는 다른 약초들과 달여서 할머니와 식구들의 약으로 사용되었다. 감기 기운이 있으면 대추와 생강, 때로는 무를 넣고 달여 마시게 했다. 아버지께서 대추나무를 심은 것은 순전히 제사와 식구들의 건강을 위한 것이었다. 

 

어릴 때의 대추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대추를 좋아한다. 나이가 들면서 장만한 밭에 가장 먼저 대추나무를 심었다. 그런데 의욕이 너무 넘쳤다. 대추나무를 밭 곳곳에 심어 관리가 힘들었다. 두어 번 옮겨 심어 이제야 자리를 잡았다. 옮겨 심는 사이에 몇 그루는 죽어 다시 심었다. 옮겨심고 난 빈자리 땅속에 남은 뿌리에서 대추나무 순이 자라 나와 제거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생겼다, 계획과 경험 부족이 가져온 결과다. 

 

올해까지 대추를 제대로 따 먹지 못했다. 작년에는 많이 열렸는데 벌레를 먹어 거의 버렸다. 올해는 방역도 하고 퇴비도 주었지만, 긴 장마통에 거의 떨어지고 남은 것도 벌레투성이였다. 아직도 경험과 정성 부족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릴 때 집 안에 있던 대추나무에 농약을 주는 것을 보지 못했다. 문명화되면서 생태계가 바뀌고, 대추 등 생물을 위협하는 것들이 많이 늘어난 것이 분명하다. 세상은 발달할수록 복잡해지고 도전과 위기가 많아진다. 그것을 이겨내야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 《대추 한 알》도 탐스럽게 붉어지기까지는 그 도전과 위기를 이겨내야 한다. 모든 인간사가 그저 되는 게 있으랴.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을 읽으며 삶을 성찰해 본다. 

 

대추 한 알

 

-장석주(1955〜 )-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 장석주 『단순하게, 느리게, 고요히』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 -

  

2005년에 발표된 시 《대추 한 알》은 장석주 시인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 시는 광화문 교보빌딩에도 걸리게 되었고, 좋은 시로 선정되어 국민애송시가 되었다. 읽기 쉬우며 복잡하지 않아 더 좋다. 

 

총 2연으로 된 시는 정형시 같은 율격을 지닌 듯하면서도 자유스럽다. 매우 간결하고 단순하며 반복적이다. 시인은 이 시를 쓰기 전에 하이쿠에 몰입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하이쿠는 일본에서 발원한 시의 한 양식으로 언어를 줄이고 함축하여 최소한의 언어로 시를 탄생시키는 기법이다. 그래서 하이쿠는 찰나의 언어이며, 여백과 침묵을 통해 삶과 세상을 성찰하게 하며 선(禪)의 세계를 탐닉하게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시조가 바로 언어의 절제를 통한 여백과 침묵의 행간을 읽게 하는 시로 발전되어 왔다. 《대추 한 알》은 시조의 운율을 지니고 있다.(김명원, 『시인을 훔치다』, 지혜 참고)

 

시인은 탐스럽게 붉어진 대추를 보며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저게 어떻게 저렇게 탐스럽게 붉어질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저절로 저 혼자 붉어질 리가 없다. 저것들이 붉어지는 데는 온갖 것들이 영양을 주고 온갖 것들이 방해했을 것이다. 시는 잘 익은 대추 한 알이 온갖 역경을 견뎌내어야 하듯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견뎌내야 하는 것들을 말하고 있다. 태풍, 천둥, 벼락, 무서리, 땡볕, 초승달 등은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에겐 견뎌내기 힘든 자연 현상임과 동시에 생존하는데 필요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고 생명을 유지하는데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임과 동시에 그것들을 통해 에너지를 얻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수많은 도전과 위협이 도사린다. 우린 그것을 이겨내고 소화하여 영양소로 전환할 수 있어야만 삶을 온전히 지탱하고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제1연을 여는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와 제2연을 여는 “저게 저 혼자 붉어질 리는 없다”는 것은, 같은 어조이면서도 다른 의미를 보여주며 서로 보완적이다. “저절로”라는 말에는 무엇인가 다른 물리적인 작용이 가해졌으며 그것을 극복하였음을 의미하며 “저 혼자”라는 말에도 다른 무엇인가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상호작용하는 것들은 대추의 성장과 결실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하고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한다. 대추는 그것들을 이겨내고 결실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의 삶, 모든 생명체의 삶이 다 그렇다. 모든 생명체의 생존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이며 적응의 역사이다. 

 

제1연에서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 없다’고 했다. 태풍, 천둥, 벼락은 대추의 성장과 결실에 위협적인 자연 현상이면서도 대추가 붉어지는데 작용하는 요소들이다. 시에서는 자연 현상만 말하였지만, 인간 세상에서 빚어지는 모든 공간적 도전과 위기 상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우린 삶의 공간에서 온갖 위기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지금도 코로나 19라는 위기와 어려운 경제 상황 등에 처해 있다. 그런 것들을 이겨낼 때 생존하고 성취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강한 내적 에너지가 생성되어 삶을 더욱 성숙시켜 나간다. 그 내적 에너지는 역경을 이겨내고 성숙으로 이끄는 힘이 된다. 삶을 지키고 성취하는 데는 사회라는 공간적 상황에서 주어지는 온갖 도전과 위협을 이겨내는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축적된 내적 에너지는 ‘쇠는 많이 달구어지고 두들겨져야 강해진다’고 하듯이 삶을 더욱 강하고 단단하게 만들어 간다. 

 

제2연에서 역시 대추는 ‘저 혼자서 붉어질 리 없다’고 했다. 무서리, 땡볕, 초승달 등은 대추가 붉어지는데 영향을 주는 것들의 통칭임과 동시에 인간이 생존하고 성취하는데 영향을 주는 것들의 통칭이다. 그리고 인고(忍苦)의 시간을 견디며 이겨내야 함을 말하기도 한다. “무서리 내리는 몇 밤” “땡볕 두어 달” “초승달 몇 날”은 시간적으로 주어지는 위협인 동시에 대추가 익기 위해 축적해야 할 영양소를 주는 원천이다. ‘무서리 내리는 몇 밤’은 익어가는 대추를 더욱 달게 만든다. 인간의 삶도 차디찬 무서리를 이겨내야만 더욱 성숙할 수 있다. ‘땡볕 두어 달’은 대추가 성장하고 익어가기 위한 영양소를 생산하게 한다. 적당한 땡볕은 좋지만 강한 땡볕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피하면 필수 영양소를 생산 축적할 수 없다. ‘초승달 몇 날’은 성장에 필요한 휴식의 시간이기도 하다. 휴식 없는 삶은 무덤이기도 하다. 모든 생명체는 초승달 아래서의 휴식과 낭만도 지녀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시간적으로 주어진 공간이다.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 데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도전과 위기에 직면한다. 그 도전과 위기는 삶의 자양분을 만드는 원동력도 된다. 우린 그것들은 두려워하거나 회피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견디며 이겨내야 한다. 

 

변증법으로 유명한 철학자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정신현상학 서설』에서 “세상에 고통과 열정없이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고통과 열정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동반자이다. 고통이 있기에 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열정이 발휘된다. 열정을 발휘하다 보니 고통은 자연스럽게 따른다. 이 두 가지는 생존과 성장, 성취를 위한 자양분이다. 그래서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43)가 말한 것처럼 “고난이 크면 클수록 영광도 크다”고 할 수 있다.

 

1954년 『노인과 바다』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1961)는 젊은 날 작가로서 실패와 고난의 날을 보냈다. 젊은 날 그는 신문사 기자로 취직했으나 ‘이걸 기사로 썼냐’는 꾸지람을 받았다. 전쟁에 참전하여 중상을 입고 귀가했으며 가족에게서도 버림을 받아 빈민가에서 생활했다, 먹을 것이 없어 공원의 비둘기를 잡아먹고 단백질을 보충했다. 출판사에 써 보내는 소설마다 채택해주지 않았으며 ‘작가의 가망이 없다’는 조롱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과 싸우며 도전과 역경을 이겨냈다. 그리고 성공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성공 이후에도 내적 도전과 역경이 계속되었다. 헤밍웨이의 삶을 보면, 고통 후에 희열과 축복이 오는 것도, 축복 뒤에 다시 고통이 오는 것도, 모두 신의 섭리인 것 같다. 인간은 태초부터 그렇게 고통과 희열의 연속적인 교차 속에 살아야 하는 숙명적인 존재인지 모른다.

 

역경을 이기고 성취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싸움에서 이겨내야 한다. 하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내적 싸움의 승리요, 다른 하나는 외적인 환경과의 싸움에서도 이기는 외적 싸움의 승리이다. 여기에는 내적인 힘과 외적인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외적인 환경을 좋게 만들어 가는 지혜도 필요하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은 대추가 온갖 역경을 견뎌내고 붉어지는 것처럼 고난을 이겨내고 이룬 성취 후에 다가오는 희열을 일컬음이다. 

 

“전쟁에서 수천의 적을 혼자 싸워 이기기보다 하나의 자기를 이기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전사(戰士)다운 최상의 전사이다.(법귀경)” 위의 두 가지 싸움에서 이겨내기 힘든 것은 외적인 싸움보다 내적 싸움이다. 내적 싸움에서 지는 사람은 외적인 싸움에서도 진다. 그래서 극기는 승리의 가장 큰 힘이다. 극기에는 내적인 힘이 필요하다. 그 내적인 힘은 목표 의식과 의지, 끈기와 노력, 인내와 절제 같은 것들이다. 

 

대추가 ‘저절로’ ‘저 혼자’ 붉어질 수 없음에는 환경적 요소도 크게 작용한다. 좋은 환경적 요소는 대추의 내공(內工)을 강하게 하여 폭풍우와 병충해를 이겨내게 한다. 뿌리가 튼튼해야 하고 토양이 좋아야 하며 병충해를 이겨내는 힘이 있어야 한다. 튼튼한 뿌리, 활기찬 생명력 등은 도전과 위기를 이겨내는 내적인 힘이다. 그 내적인 힘은 도전과 위기로 더욱 강화된다.

  

대추가 붉어지기 전에 병충해에 시달려 모두 떨어진 이유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한 탓이다. 방역을 했지만 적시에 적합한 방역을 하지 못한 탓이다. 퇴비를 주고 관리했지만 적시에 적합하게 하지 못한 탓이다. 환경을 가꾸어 주는 데도 적시성(適時性)과 적합성(適合性)의 원칙이 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대추가 비바람에 떨어지고, 벌레가 먹고, 붉어지지 못한 것은 지식과 노력, 정성의 부족이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19 상황에서 모든 영역에 걸쳐 시련을 겪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긴 장마와 폭우, 천둥과 번개에 시달려 병들고 벌레 먹어 영글지 못한 대추처럼 삶을 위협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그것을 회피할 수 없다. 견뎌내고 이겨내야 한다. 여기에는 삶의 환경을 잘 가꾸고 극복하게 하는 정부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역경을 이겨내고자 하는 개인의 의지와 노력, 이를테면 내적인 에너지가 더욱 중요하다. 결코, 좌절해서도 성급해서도 안 되며 절제와 인내로 이겨내야 한다. 힘들수록 목표를 다시 잡고 나아가며 극복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도전과 위기는 대추가 붉어지기까지 오랜 시간과 공간에서 견뎌냈듯이 단번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극복 해결된다. 

 

대입 수능시험을 앞두고 있다. 올해 수능시험은 코로나 19로 상황이 좋지 않은 데다가 잦은 휴업으로 학생들의 내적인 에너지도 충분하지 못한 것 같다. 우린 학생들에게 최상의 수험 환경이 되도록 정성을 쏟아야 한다. 학생들 또한 절제와 인내로 자기를 잘 가꾸어 에너지가 소진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잘 붉어진 《대추 한 알》처럼 각자의 목표를 이루어야 한다.

  

영화 [내가 죽던 날(박지완 감독)]에서 형사역을 맡은 배우 김혜수가 인터뷰에서 한 말을 새겨본다. “고통은 극복하기보다는 그 순간을 버텨내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말없이 건네는 손길 하나가 큰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다는 걸 아셨으면 좋겠어요. 현수가 세진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진 못해요. 다만 자신과 닮은 상처를 가진 사람을 보듬음으로써 현실과 직면하고 그 다음을 생각할 용기를 내는 거죠. 영화 제목대로 ‘내 마음이 완전히 죽던 날’이지만 다시 살아갈 날이 남아 있다는 희망을 관객이 느끼셨으면 좋겠어요.”(동아일보 2020.11.9.) 

 

《대추 한 알》이 붉어지기까지는 적어도 세 가지 힘이 필요하다. 첫째는 견뎌내는 힘이요, 둘째는 이겨내는 힘이며, 셋째는 도전과 위기를 에너지로 만들 줄 아는 힘이다. 그 힘들은 단번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담금질 되면서 형성된다. 우리 민족은 오랜 역사 속에서 그 힘을 길러 왔다. 사람들 모두가 그 힘을 길러 이 역경을 견디고 이겨 《대추 한 알》처럼 잘 붉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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