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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쉽게 씌어진 시》, 성찰과 지조있는 삶의 다짐

이상호 | 입력 : 2020/12/07 [15:12]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천안아산경실련공동대표=이상호] 2019년 12월 1일 일요일 밤 감사원과 검찰이 산업부 원전산업정책과 사무실에서 월성 1호 문건 444건을 삭제한 것을 두고 산업부 공무원에게 “누구 연락을 받고 한 일이냐”고 추궁했을 때, 해당 공무원들은 “연락받은 일 없다. 나도 내가 신내림을 받은 것 같았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조선일보 2020.12.3) 만약 공무원들이 궁지에 몰리자 ‘신내림을 받았다’며 둘러댄 것이 사실이라면, 그 말의 이면에 신과 같은 엄청난 힘이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여당은 월성 1호 관련 수사뿐만 아니라, 각종 권력형 비리 의혹 수사를 두고 검찰의 수사가 잘못된 것이라고 야단이었다. 여당과 청와대는 야당의 반대에도 그들이 임명한 검찰총장이 못마땅해 계속 비난해 왔다. 그런 가운데 윤석열 검찰총장의 직무 배제와 징계라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강공에 윤석열 검찰총장의 대응과 헌법소원 등의 갈등은 루비콘강을 건넜다. 

 

특히 윤석열 검찰총장의 징계를 앞두고 추미애 핵심 참모로 알려진 고기영 법무부 차관이 “최근 일련의 사태에 대해 차관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하면서 12월 1일 전격 사임했다. 이에 침묵을 일관해 온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용구 씨를 법무부 차관으로 임명했다. 이용구 차관의 내정을 두고 그가 월성 원전 1호기 경제성 조작 의혹으로 고발된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변호를 맡아 온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더 커졌다. 

 

이런 가운데 대전지방법원이 12월 4일 월성 원전 1호기 경제성 조작 의혹 사건과 관련해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 2명에 대한 사전 구속 영장을 발부했다. 이로써 원전 1호기 폐로 과정의 경제성 조작이나 자료 삭제 등을 지시했다고 의심받는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과 채희봉 전 청와대 산업정책비서관 등 윗선에 대한 검찰 수사가 탄력을 받게 됐다. 

 

이에 대해 여권에서는 “표적․정치 수사가 공직 사회를 거꾸로 흔들고 있다”면서 검찰을 맹비난하고 ‘검찰 총리’ 운운하며(강선우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의 말, 서울 경제 2020.12.7) 윤석열 내치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윤석열 검찰총장을 포함한 상당수의 검찰은 윤석열 징계의 부당성에 항의하면서 수사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어느 쪽이 정의로울까? 

 

옛날도 그랬지만 요즈음 정치 상황을 보면, 양심과 정의도 권력에 따라 춤추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전에 국회의원이 된 지인에게 ‘영혼을 지키는 국회의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에선 혼을 지키면서 정치를 하다간 토사구팽(兎死狗烹)당하기 쉽다’는 이율배반적인 말을 한 적이 있다. 지방자치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며 기초자치단체장까지 선출하는 시대에 경력직 공직자가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고위직으로 승진하기란 쉽지 않다. 고위직으로 승진하려면 영혼을 자기 양심이 아니라 윗선에 잘 저당잡혀야 한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천박한 권력 정치에서 영혼을 지키며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신내림’을 받았다는 공무원이나, 정치적 상황마다 무조건 옹호와 비난을 가하는 정치 집단과 정치인은 과연 혼을 어디에 두었을까? 혼을 상실한 정치적 발언은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일찍이 윤동주 시인은 일제 폭압에서, 자기 영혼과 지조를 지키기 어려움을 《쉽게 씌어진 시》로 토로했다. 

 

쉽게 씌어진 시

- 윤동주(1917〜1945)-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 시선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미래사, 2004-

 

윤동주 시인은 1917년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할아버지 대로부터 기독교를 믿었고 아버지는 교원이었다. 시인이 태어난 북간도 지역은 애국지사들이 많이 모여살던 곳으로, 윤동주는 어린 시절부터 우리민족이 서로 민족적 일체감을 결속하며 독립의지를 일깨우며 살아가는 모습(신동욱, “순결한 혼의 시인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미래사, 2004)을 보고 자랐다. 그의 시에는 그런 배경에서 자란 시인이 성장하며 겪는 민족적 삶과 독립, 인간다운 삶의 갈등, 일본으로 유학하면서 겪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 험난한 세상에서 자기의 주체성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하는 고뇌와 성찰이 깃들어 있다.  

 

오래 전에 일본을 여행하면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윤동주가 다녔던 교토에 있는 도지사 대학이었다. 직원들은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스스로 친한파라고 했다. 학교에는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안내를 받으며 설명을 들을 때 가슴이 뭉클해졌다. 시인의 서시(序詩)를 마음속으로 읊을 때는 가슴이 먹먹해 오고 눈시울이 적셔져 있었다. 

 

《쉽게 씌어진 시》는 “나의 누추한 방이 달빛에 잠겨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는 것보다 오히려 슬픈 선창이 되는 것이다”(윤동주, <달을 쏘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미래사, 2004)고 했던 말처럼, 윤동주 시인이 일제의 폭압에서 고귀한 영혼을 지키기 힘든 심정을 토로한 시이다. 험난한 시대에 세속과 타협하지 않고 영혼을 지키며 지조 높게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그래서 우린 정의의 지조를 지킨 사람들을 존경하고 우러러본다. 이 시는 고귀한 영혼을 지키며 지조 있는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간결하면서도 총 10행으로 된 자유로운 서정시이다. 시의 속살에는 일제의 폭압에 대한 저항과 거기에 무기력한 자신을 지키려는 성찰과 결의, 미래지향적인 의지가 담겨 있다. 자신이 처한 현실과 삶을 응시해보니 현실 속의 자기 삶은 《쉽게 씌어진 시》처럼 부끄럽다. 

 

제1연에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라고 했다. 창밖 밤비의 속살거림에서 일제라는 암울한 현실에서 타향객지의 누추한 방안에 처한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아를 성찰하고 있다. 시인이 처한 방안은 그저 창이 하나밖에 없는 누추한 방안인데 심리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가혹하게 구속된 암울한 육첩방(六疊房)이다. 정이 들지 않는 남의 나라이다. 밤비가 속살거리는 시간 속에 처한 시인의 공간은 암울하다. 

 

시인은 상념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보려고 종이와 연필을 들었다. 자신을 돌아보니 슬픈 천명(天命)을 가진 시인이다. 왜 슬픈 천명일까? 암울한 현실에 뛰어들어 행동으로 투쟁해야 하는데,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시를 쓸 수밖에 없으니 시인이 된다는 것은 슬픈 천명이다. 그래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하고 적어간다. 

 

제3연과 4연에서 보내주신 학비에는 부모님의 ‘땀내와 사랑내’가 포근히 품어져 있다. 그 ‘땀내와 사랑내’에서 부모님과 조국의 숨결을 느낀다. 사명을 깨닫는다. 허투루 쓰면 안 된다. 마음을 다잡고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라도 들으러 간다.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럽지만, 공부는 무상의 명령이고 사명이다. 

 

제5연과 6연에서 보내주신 학비는 시인을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해주었다. 생각해 보니 “어린 때 동무를/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있다. 어린 때 동무를 죄다 잃어버린 것은 고향과 추억, 혼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를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괴롭다. “나는 무얼 바라” 여기까지 와 있는가? 왜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침전(沈澱)은 의식이나 사고, 행동이 내부에 가라앉는 것이다. 그러니 홀로 침전한다는 것은 무기력에 빠진 자아에 대한 인식이다. 행동하지 못하고 홀로 밤비 젖는 방안에서 시나 쓰고 앉아 있는 자신이 한심스럽기 때문이다. 시인은 깊은 갈등에서 자신을 채찍질한다. 

 

제7연에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고 했다. 자아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일제의 폭압은 갈수록 심해지고, 동포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간다. 독립은 묘연하고, 사람들은 살아가기가 너무 어렵다. 그런데 시를 써보니 시는 너무나 쉽게 씌어진다. 이 말은 시 쓰기가 정말 쉽다는 것이 아니라, 독립투쟁 같은 행동보다 힘들게 살아가는 동포들의 삶보다 쉽다는 자책이다. 진정으로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현실 속에 뛰어들어 행동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앉아서 시만 쓰고 있으니 시 쓰는 것 자체도 “부끄러운 일이다.” 정의와 지조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책이며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다짐이기도 하다. 

 

제8연에서 다시 자신이 처한 시간과 공간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자신이 처한 공간은 “육첩방의 남의 나라”이다. 조국과 고향을 잃은 유량의 몸으로 남의 나라(일제의 폭압)에 얽매여 있다. 그런데 창밖엔 밤비가 여전히 속살거리고 있다. 그러니 다시 깊은 상념에 빠질 수밖에 없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제9연에서 그 답을 찾는다. 미약하나마 온 힘을 다해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자 한다. 등불은 어둠을 밝혀주는 빛이다. 현실이 힘들더라도 그 현실과 타협해서는 안 된다. 작은 힘이나마 등불이 되어 세상의 어둠을 조금만 내몰더라도 행동으로 옮겨야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야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가 될 수 있다. “시대처럼 올 아침”은 시인이 간절히 바라는 조국 광복이며 동포의 희망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가 되려고 한다. 여기에는 어떤 유혹과 타협과 위협이 있더라도 지조와 정의를 지키고자 하는 진한 결의가 담겨 있다. ‘최후의 나’라는 말속에는 정의를 위해 행동하고자 하는 결의가 번득인다. 

 

결심하고 나니 후련하다. 그래서 갈등하는 자아끼리 타협하고 결의를 한다. 제10연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에는 갈등하는 내면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가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결의를 드러낸다. 자아의 통일이요, 정체성이 확립된 통합된 자기 주체자가 된다. 이제는 자기 정체성을 흔들림 없이 지속시켜 나가야 한다. 두 자아는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를 한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며 행동강령이기도 하다. 

 

이 시는 3단계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1단계는 시인이 처한 암울한 현실이다. 조국도 고향도 잃어버린 유랑의 몸이다. 안식처라고 있는 곳도 육첩방인 남의 나라이다. 어디에 몸을 둘 곳조차 없다. 그래서 깊은 고뇌와 성찰에 빠진다. 2단계는 돌아보니 현실에 안주하면서 부끄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현실에 나아가 행동하지 못하니 시를 쓰는 것조차 부끄럽다. 육첩방에 처해 안주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채찍을 가한다. 3단계는 깊은 성찰을 통해 얻은 해답으로 자기가 나아갈 길 즉 현실 극복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제 시인은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고귀한 양심과 지조를 지키며 희망찬 내일(조국의 광복과 밝은 미래)을 위해 어둠을 내모는 등불이 되고자 한다. 비록 그것이 ‘나의 최후’가 될지라도. 

 

시인은 결국 행동에 나섰던 모양이다. 그는 일본 도지사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인 1943년에 연희전문학교 동창 송몽규와 독립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고문을 받다가 옥사했다. 고귀한 영혼을 지니고 양심과 지조를 지키며 행동하고자 했던 시인의 삶은 그렇게 끝이 났지만, 그의 혼은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후세들에게 정의와 양심과 지조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할 것을 주문한다.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는 1939년 조선일보에 실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그는 1941년 연희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시집(自選詩集)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졸업 기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자필로 남긴 3부가 전해졌고, 1946년 《쉽게 씌어진 시》가 다시 경향신문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1948년과 1955년 유고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계속 출간되어 우리에게 읽히고 있다. 다행이다. 

 

“양심이야말로 스스로 돌아보아 부끄럽지 않다는 자각(自覺)을 갑옷 삼아 아무것도 두렵게 하지 않는 좋은 친구다”고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는 말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돈과 권력에 취해 그 소중한 친구를 버리는 “파우스트(괴테의 소설 『파우스트』의 주인공)”가 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우리는 “모든 타락 가운데 가장 경멸해야 하는 것은 자기의 의지에 의존하지 않고 타인의 의지에 의존해 사는 것이다.(도스토예프스키의 『미성년』)”는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ylovich) Dostoyevsky 1821 〜1881)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지조를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우랴. 그래서 조지훈은 “지조(志操)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조지훈(趙芝薰, 1920~1968), 지조론(志操論)”고 했다. 그러나 의지가 있는 곳에 길은 있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양심과 정의보다는 권력의 편에 서서 권력의 나팔수와 전위대가 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정치인들과 세상 사람들은 쉽게 말을 하고 쉽게 권력과 타협을 하고 쉽게 권력의 편에 서서 타인을 공격한다. 그러나 그들은 《쉽게 씌어진 시》에서처럼 성찰하지 않는다. 그런 정치인들이 넘쳐 대립하는 세상은 결코 정의롭지 못하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현실은 양심과 정의보다 권력이 장악해 버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 최종적으론 정의가 이기지만, 그것은 또 잠시 권력과 권력 아부족은 다시 권력에 취해 춤춘다. 정의가 권력의 뒤에서 울부짖을수록 국민의 삶은 어렵고 혼란스러워진다. 지금 혼란한 정국에서의 싸움은 과연 누가 정의로울까? 

 

윤동주 시인의 《쉽게 씌어진 시》는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고귀한 영혼을 지키기 위해, 지조와 양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성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국민은 코로나 19와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힘겨워죽겠는데 정쟁만 일삼으며, 함부로 말을 하고 쉽게 정책을 입안하는 정치인들과 관료들은 어떤 영혼을 지니고 있을까? 영혼을 어디에 두었을까? 우리는 모두 깊은 성찰을 통해 자본과 권력의 유혹에서 벗어나 양심적 자아를 깨워 정의의 편에 선 통합된 자아로 태어나 양심과 ‘눈물과 위안’의 악수를 하는 ‘최후의 나’가 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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