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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하면터면...거사 이틀전 33인 권동진이 조선군사령관에 ‘밀고’

한광수 기자 | 입력 : 2021/03/02 [15:36]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권동진    사진출처=네이버인물정보  © 뉴스파고

 

[뉴스파고=한광수 기자] 3·1운동 거사가,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권동진에 의해 사전 밀고된 사실을 암시하는 당시 조선주둔 사령관의 일기가 발견되면서, 자칫 거사가 33인 중 한 사람의 밀고에 의해 허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는 충격과 함께, 3.1운동에 대한 재조명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4년 전 ‘3·1운동 10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던 KBS <시사기획 창>의 ‘밀정’팀이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가 당시 작성한 일기장에서 확인했지만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우쓰노미야 다로는 1916년 8월 일본군 제4사단장에 오른 후, 3·1운동 1년전인 1918년 일본군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임무를 맡고 조선군 사령관이 된다. KBS는 2년전 방송한 ‘밀정’ 프로그램에서 그를 밀정의 배후 인물로 밝혀냈다.

 

우쓰노미야 다로는 3·1운동 이틀 전인 2월27일 우쓰노미야가 거사를 이미 알고있다는 내용의 문구를 그의 일기에 적어 놓았으며, 그가 3·1운동 거사를 알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권동진으로 적시하고 있다. 

 

실제로 우쓰노미야 당시 일기에 권동진이 내방했고, 권동진으로부터 3·1운동 거사를 암시하는 말을 전해 들은 것으로 일기는 적고 있다. 

 

 권동진이 3·1운동을 밀고한 것으로 작성된 우쓰노미야 다로의 일기 원본. 출처 : Focus1(http://www.focus1.kr) © 뉴스파고

 

당시 2월27일 일기에는 “야식을 먹은 후, 권동진 내방. 조선 민심의 괴리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실상을 말했다. 처음부터 생각했던 대로다. 그리고 이번 국장 때 무슨 사건이 벌어질지 장담하지 못하니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적혀 있다. 

 

3·1혁명은 고종의 죽음에 대한 의심과 국장을 즈음해 거사가 이미 계획된 상황이었다. 권동진이 밀고한 계획의 실상과 구체적인 내용은 해당 일기로 봐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3·1운동 이틀 전 일기말고도 거사 발발 이틀 후의 우쓰노미야은 권동진의 경고를 무시한 자신을 책망하는 듯한 생각을 일기에 적고 있다. 

 

우리 민족이 천신만고 끝에 준비한 거사를 33인 중 한 사람에 의해 발각될 위기에 놓였지만, 일본군 조선주둔 사령관의 오판으로 민족의 정기를 세울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가 교차하고 있다.

 

우쓰노미야 일기 원본은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에 소장돼 있고, KBS <시사기획 창>의 ‘밀정’팀에 참여한 더채널 김광만 PD가 입수해 이번에 알려지게 됐다.

 

김광만 PD는 “우쓰노미야 다로 사령관이 권동진의 밀고를 무시한 것은 우리 민족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최고의 위기를 넘긴 것”이라면서 “아마 그는 그간 10년 통치의 자신감이 있었고, 일부 조선 지도자들이 명월관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나 부르다 헤어질 것이라고 예사로이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다다음날, 즉 3·1혁명이 일어나던 날 우쓰노미야 다로 사령관의 대응에서 추론해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 상황을 전개하면 우쓰노미야 다로 사령관은 3월1일 오후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당일 아침 조선호텔에서 아키야마 대장 등 몇 사람을 만나고 돌아와 고가 렌조 장관과 함께 오찬을 하다 오후 3시께 돼서야 경무총장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불온’한 상황임을 인식해 1개 중대를 출동시켰다. 

 

오후가 되면서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게 되고 심지어 ‘아군으로 생각했던 천도교를 완전히 적으로 축출해야겠다’는 배신감과 함께 분노를 표출한다. 

 

우쓰노미야가 천도교를 향해 배신감을 표출한 것은 천도교와 사전 교류와 소통이나 밀약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날(3월1일)까지도 그는 비록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물론 진압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그 뿌리가 심히 깊어 장래 형세가 매우 우려스럽다.’고 쓰고 일본의 무리한 강압적 병합정책에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 

 

이후 권동진의 경고를 무시한 사실과 험악한 민심에 대한 생각이 3월 3일 일기에 드러나 있다.

  

“이태왕 국장 거행. 오전 7시부터 참렬(…) 근래 조선의 험악한 민심과 권동진의 경고, 1일 이래의 소요를 볼 때 오늘은 어쩌면 적어도 무언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고 내심 크게 경계하고 있었으나 무사히 식을 마치고….”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권동진의 며칠 전 경고(밀고)를 무시한 후회가 비치는 대목이다. 

 

김광만 PD는 “천도교 지도자인 권동진과 우쓰노미야 다로는 오랜 기간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던 것이 여러 자료에 나와 있다”면서 “특히 권동진의 형 권영진은 명성황후 암살에 관여해 우범선, 이두황(동학혁명 토벌대) 등과 함께 일본에 망명해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고 권동진 또한 일본에 망명해 우쓰노미야를 잘 알고 교류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이 밀고와 관련 민족연구소 조한성 연구원은 <만세열전>에서 권동진이 우쓰노미야 다로 사령관을 만난 이유에 대해 적어 놓았다. 

 

조한성 연구원은 “아마도 이는 천도교 지도부의 독립선언 후 정국 전망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독립선언 후 일제 당국과 협상을 통해 정권을 인수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만큼, 일제 당국자와 미리 일정한 관계를 만들어 놓고자 했던 것이다. 권동진의 우쓰노미야 방문은 최고 지도자 손병희도 미리 양해한 사안일 가능성이 높다”고 적어 놓았다. 

 

하지만 김광만 PD는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김 PD는 “만약 독립선언 후 일제와의 관계 설정을 염두에 뒀다면 총독부나 경무총감부 등에도 밀고나 귀띔을 했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논리 비약이다”라고 단호했다. 

 

김 PD는 또한 “일본 조선군사령관 한 사람 정도와의 교감으로 이런 일이 마무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독립선언이 발표된 후에 그 운동이 어떻게 진행되고 폭발되어 나아갈지를 전혀 예측 못한 천도교 지도부의 무능한 비전의 결과”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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