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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강철 새잎》처럼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이상호 | 입력 : 2021/03/05 [11:58]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대표] 정월 대보름이 지나고 매실나무와 대추나무를 손질했다. 시린 바람이 계속 볼을 때리는데도 매실 꽃 몽우리가 피어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매년 있는 일이지만 신기했다. 다음날 꽃샘추위가 닥치자 꽃 몽우리들은 잔뜩 움츠렸다. 추위가 지나가고 햇살이 비치자 더 적극적인 자세로 꽃을 피울 채비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봄이 오는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줄곧 박노해의 시 《강철 새잎》이 떠올랐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박노해의 시집 『참된 시작』을 읽어갔다. 특히 《강철 새잎》을 몇 차례 읽으면서 코로나 19와 추위에 힘든 사람들 모두 《강철 새잎》처럼 희망으로 피어나기를 기도했다.

 

 


강철 새잎 

- 박노해(1957〜 )-

  

저것 봐라 새 잎 돋는다 

아가 손마냥 고물고물 잼잼 

봄볕에 가느란 눈 부비며 

새록새록 고목에 새순 돋는다 

 

하 연둣빛 새 이파리 

네가 바로 강철이다 

엄혹한 겨울도 두꺼운 껍질도 

제 힘으로 뚫었으니 

보드라움으로 이겼으니 

 

썩어가는 것들 크게 썩은 위에서 

분노처럼 불끈불끈 새싹 돋는다 

부드러운 만큼 강하고 

여린 만큼 우람하게 

오 눈부신 강철 새잎 

 

-박노해 시집 『참된 시작』 느린걸음, 2016-

  

박노해의 시를 단지 노동자를 선동한 시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박노해 시의 진가를 모른다. 박노해의 시를 읽다 보면 어딘가 모르게 힘이 솟는다. 그래서 박노해의 시를 사랑한다. 사실 노동자들의 잠언이라 할 정도로 많이 읽히고 그들에게 힘을 주었던 시집 『노동의 새벽』(1984)도 절망이 아니라 희망과 의지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시에는 노동자들에게 척박한 삶에서도 희망과 해방이란 욕망을 채찍질하고 있었다. 

 

위의 시 《강철 새잎》을 감상하기 전에 시가 수록된 시집 『참된 시작』의 출간 배경을 이야기해야겠다. 박노해는 1991년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으로 검거되어 사형을 구형받고 무기징역에 처해 졌다.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도 매우 담담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시집 『참된 시작』에 실린 사형을 선고받고 나오는 그의 사진은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람이 어찌 사형을 선고받고도 저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을까? 그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삶을 완전히 포기하고 세상을 조롱하고 있거나, 다른 하나는 삶의 강렬한 희망 에너지를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시집 『참된 시작』을 읽다 보면 그가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내면에 삶의 희망 에너지가 용솟음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시집 『참된 시작』은 그가 사형 선고를 받고 옥중에서 쓴 시를 모아 1993년에 발표되었다. 사형 선고를 받고 수감 중인 그의 내면에 희망 에너지가 강렬하게 용솟음치고 있었기에, 또 스스로를 희망의 에너지로 담듬질하고 있었기에 그는 생존 의지가 불타는 시집 『참된 시작』을 출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위의 시 《강철 새잎》에서도 그런 삶의 의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시의 시간적 배경은 봄이 오는 길목인 2월 말이나 3월 초이다. 공간적 배경은 교도소 안이다. 시인은 아마 교도소 마당에 나와 단체노동이나 단체운동을 하면서 혹은 교도소 방에서 창으로 비치는 나무와 풀들의 새잎 돋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시인은 그 새잎 돋는 모습을 보면서 온갖 고난을 이기고 살아남는 강철 같은 생명력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강철같은 생명력을 스스로 내면화하였으며 모든 사람이 그 생명력을 가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제1연의 “저거 봐라 새잎 돋는다”에서 말하듯 시인은 새잎 돋는 나무와 풀들을 보면서 생명의 위대함에 감탄사를 보낸다. 자세히 보니 새잎은 “고물고물 잼잼”하는 아가 손마냥 “봄볕에 가느란 눈 부비며/새록새록 고목에 새순 돋는” 연약하고 보드랍고 순수하다. 그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간직한 희망의 모습이다. 어린아이는 연약하지만, 희망의 상징이다. 여기서 ‘고목’과 ‘새순’의 의미는 대비된다. 고목은 낡고 오래된 거의 쓸모가 없는 죽어가는 것들이다. ‘새순’은 새로 돋아나는 생명이다. 고목에 새순이 돋으니 낡고 병든 몸에 새 희망이 돋는 것이다. 자기 자신일 수 있다. 사형 선고를 받고 이미 죽어갈 고목이 된 자신에게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희망은 모든 것을 살리는 힘이다. 

 

제2연에서 그 새잎을 보면서 “하 연둣빛 새 이파리/네가 바로 강철이다”고 감탄하며 새 이파리가 연약하게 보이지만 강인함을 인정한다. 왜 강한가? 그 새이파리는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그것은 “엄혹한 겨울도 두꺼운 껍질도” ‘제 힘으로 뚫었으며 보드라움으로 이겼기’ 때문이다. “엄혹한 겨울”은 두 가지를 상징한다. 하나는 폭력과 압제에 시달리던 과거와 감옥 속에서 절망에 빠진 혹독한 시간이다. 사형 선고를 받고 겨울 동안 차가운 감옥 안에서 지냈으니 얼마나 엄혹하였을까? “두꺼운 껍질”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각종 압제와 정치적 폭력이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다른 것도 아닌 ‘제 힘으로 뚫고/보드라움으로 이겼으니’ 얼마나 대견스러운가?

  

폭력과 압제에 대처하는 생명체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 한갓 미물인 자벌레도 위협을 느끼면 숨을 죽이며 꼼짝하지 않고 엎드려 있다가 위협이 사라졌다 싶으면 다시 움직인다. 모든 생명체는 폭력과 압제 앞에서 생존을 위해 일단 납작 엎드린다. 폭력과 불공평에 대한 인간의 대처 방식은 다르다. 폭력에 대해서는 대체로 납작 엎드려 있다가 자기의 힘이 생겨나거나 기회가 생길 때 폭력에 대처하거나 폭력을 피한다. 그러나 불공평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경멸한다. 한계를 넘어선 폭력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싸우거나 아예 폭력을 피해 달아난다. 

 

폭력과 압제에는 성급하게 정면 대항해서는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다간 너무 큰 희생을 겪을 수 있다. 우선은 폭력을 피하며 이겨낼 때까지 엎드려야 한다. 그것은 생명을 지키고 폭력을 이겨내는 에너지를 기르는 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폭력과 압제 앞에서도 희망과 신념을 잃지 않는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투쟁을 한 선열들을 떠 올린다. 그분들은 일제라는 폭력과 압제 앞에서 오랫동안 엎드렸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힘을 길러 봉기했다. 일제의 폭력과 압제에 맞서다가 체포되어 차디찬 감옥에서도 고목에 새순이 돋는 것처럼 희망과 신념을 꺾지 않고 고뇌하며 의지를 다졌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해방이란 새잎이 돋아날 수 있었고 지금 우린 그 새잎이 키워낸 나무에서 살 수 있다. 폭력과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폭력과 압제를 뚫을 수 있는 ‘제 힘’이 있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보드라움의 지혜를 길러야 한다. 역경을 뚫을 수 있는‘제 힘’과 ‘보드라움’은 역경 극복의 중요한 에너지이며 지혜이다. 

 

‘제 힘으로 뚫고 보드라움’으로 이겨야 생존의 주체자가 될 수 있다. 인도의 위대한 사상가요 독립운동가였던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는 영국의 폭력과 압제 앞에서 끝까지 비폭력과 무저항으로 대처했다. 중요한 것은 희망과 신념 의지를 잃지 않고 ‘제 힘’을 기르는 일이었다. 간디의 그 비폭력적인 무저항 앞에서 영국의 폭력과 압제도 힘을 잃어갔다. 그런 간디의 철학과 행동은 인도인들뿐 아니라 전 세계의 식민지인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잃지 않도록 했다. 중요한 것은 약하지만 ‘제 힘’으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그 폭력과 압제를 이기기 위해 다른 폭력과 압제를 빌린다면, 그것에 의해 또 압제당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 힘으로 뜷고 보드라움으로 이기는 일’은 중요하다. 보드라움이라야만 생명을 보존하고 ‘제 힘’을 길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제3연에서 “썩어가는 것들 크게 썩은 위에서/분노처럼 불끈불끈 새싹 돋는다”고 했다. “썩어가는 것들 크게 썩은 위에서”는 당시의 부패한 정치사회체제를 말할 것이다. 당시의 정권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정권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일반 국민에게도 폭력과 압제를 자행했다. 악덕 자본가들과 폭력적인 정권은 노동자들을 핍박했다. 그러니 그것은 썩을 대로 썩은 것들이다. 그런데 그 위에서 새싹이 “분노처럼 불끈불끈” 돋는다. 새싹은 압제에 대한 저항이며 압제 속에서도 피워내야 할 희망이다. 

 

그렇게 “분노처럼 불끈불끈” 돋은 새싹은 부드러움 만큼 강하고 여린 만큼 우람하다. 눈이 부신다. 그래서 “오 분부신 강철 새잎”이라고 감탄한다. 여기서 강철은 강함의 이미지이다. 불타협과 불굴의 상징이다. 포기하거나 꺾이지 않을 힘이다. 그렇게 돋아난 강철 새잎은 어느 것에도 굴하지 않고 크게 피어날 희망이며 잠재적 가능성이다. 그러기에 그것을 힘차게 가꾸어야 한다.

 

희망이 있는 한 모든 생명체는 살아나게 된다. 따라서 어떠한 고난과 폭력과 압제에서도 희망만은 잃지 말아야 한다. 이 시를 읽으며 오스트리아의 정신 의학자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1997)이 아우슈비츠의 생존 체험을 기록한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ch for Meaning)』(이시형 옮김, 청아출판사, 2005)를 떠 떠올린다. 나는 이 책을 대학 시절에 읽고 매우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다시 책을 사서 읽었다. 

 

그가 살았던 20세기는 어떤 시대였던가? 이전의 시대와는 완전히 차별화되게 과학 기술과 문명의 급속한 발달로 인간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갔고 더 많은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시대로 변화되어 갔다. 하지만 제국주의가 출현하여 약한 나라와 민족을 폭력과 압제로 수탈하고 죽이던 시대였다. 강자들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벌이고 약한 나라를 지배하고 수탈했다. 그런 과정에서 엄청난 사람들이 전쟁과 폭력으로 죽어갔다. 제1차 세계 대전이 그랬고 제2차 세계 대전이 그랬다. 20세기의 전쟁은 발달된 기술 문명의 탓으로 그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무차별 대량학살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그리고 국가라는 이름으로 정치적인 폭력이 정당화되기도 했다. 일제의 조선 지배와 수탈, 독일 히틀러의 만행이 대표적이었다. 그 시기에 빅터 프랭클이라는 유태인 학자가 아우슈비츠라는 강제 수용소에 끌려갔다. 아우슈비츠는 문명이 만들어 낸 가스실에서 일거에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죽음의 수용소였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이라고 할 만큼 놀랍게 살아 돌아와 자신이 겪은 일들을 담담하게 전하고 있다. 그는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을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가 살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 아니라 다른 힘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내일 아니 오늘 저녁에 당장 죽음의 가스실로 끌려갈지도 모르지만, 열심히 자기관리를 한다. 그는 강제노역장에서 유리 조각을 발견하면 몰래 주워 숨긴다. 그리고 그것을 갈아 수염을 깎아 낸다. 아직 일을 할 수 있는 만큼의 생기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종이와 연필을 주워 틈만 나면 기록하고 기억에 저장한다. 그러한 그의 행위는 생존에 대한 강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러기에 아직 쓸모가 있다고 판단되어 가스실로 가지 않았다. 그런 그의 행동은 희망과 동시에 자신을 지탱하는 강철같은 의지의 소산이었다. 

 

이 책에서 나는 빅터 프랭클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은 그의 내부에 도사린 강한 생존에 대한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절대 절망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자기를 가꾸어가는 자기 긍정과 자기관리의 힘이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ch for Meaning)』는 20세기에 자행된 가공할 폭력과 살육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만 특히 극한의 폭력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 중요한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남극 탐험을 이야기할 때 로얄 아문센(Roald Amundsen 1872〜1928), 로버트 스콧(Robert Falcon Scott, 1868〜1912), 어니스트 섀클턴( Ernest Henry Shackleton, 1874 ~ 1922)을 자주 거론한다. 그중에서도 로버트 스콧과 어니스트 섀클턴이 자주 대비된다. 이유는 두 사람이 약 3년의 시차를 두고 남극 탐험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극과 극이었기 때문이다. 스콧과 탐험대 8명은 1911년 12월 3번째 남극 탐험에 도전했지만 1912년 11월 모두 시신으로 발견된다. 스콧의 시신 옆에는 그가 쓰다만 일기장이 발견되었는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신사처럼 죽을 것이며 불굴의 정신과 인내력이 남아 있음을 보여 줄 것이다. 이 짧은 글과 우리의 시신이 그 이야기를 대신해 줄 것이다. 안타깝지만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 같다. 모든 꿈이 사라졌다” 

 

섀클턴과 27명의 대원은 1914년 11월 5일 남극 탐험의 전초기지 격인 사우스조지아 섬 그리트비겐 포경기지에 도착한다. 그들은 애초 1915년 1월 전에 웨들해를 건너 남극 기지에 도착하고자 했지만 1915년 1월 8일 그들이 탄 인듀어런스호가 부빙(浮氷)에 갇혀 조난을 당한다. 그러나 1916년 8월 섀클턴과 일행 27명은 조난 당한지 1년 7개월 만에 전원 무사 귀환을 한다. 섀클턴은 그의 자서전 《사우스(SOUTH)》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와 대원들은 남극 얼음 속에 2년이나 갇혀 살았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꿈을 버린 적이 없었다.” 

 

뒷날 사람들은 스콧과 그 일행이 살아오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영하 40도의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꿈을 저버렸기 때문이며 섀클턴 일행이 살아 돌아온 것은 그들이 꿈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SERICEO 콘텐츠 팀 지음, 『삼매경』, 삼성 연구소, 2011, 160쪽〜162쪽)

  

우리는 참으로 엄혹하고 두꺼운 껍질의 ‘코로나 19속의 겨울 터널’을 지나오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생존과 존엄성을 위협하는 폭력과 압제였다. 우린 그것을 우리 힘으로 뚫어야 하며 보드라움으로 극복해 내야 한다. 거기엔 《강철 새잎》과 같은 희망과 생존 의지가 필요하다.

  

희망을 잃지 않으면 살아날 수 있다. 죽음은 희망의 끈을 놓는 순간이다. 나이가 들고 병들어 죽을 때도 마지막은 희망의 끈을 놓는 순간이라고 한다. 암에 걸린 환자들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한, 희망으로 자기관리를 하는 한 생존할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래서 우린 살아 있는 한 절대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하며 도전해야 한다. 이제 모든 국민은 백신을 맞게 되고 집단 면역이 생성될 것이라 한다. 서서히 엄혹한 겨울과 두꺼운 껍질을 뚫고 보드라운 만큼 강하고 여린 만큼 우람하게 강한 새싹을 돋아 낼 때가 되었다. 그때까지 빙역 수칙을 지키며 돋아날 채비를 해야 한다. 

 

시 《강철 새잎》을 읽으며 빅터 플랭클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말하는 생존을 위한 자기 긍정의 메시지를 되새겨 본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삶의 의미를 불러 일으킨다.”(131쪽),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을 부른다.”(134쪽)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137쪽) 그러니 “비통과 환멸”(159쪽)에 빠지지 말고 《강철 새잎》처럼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다시 평화로운 삶의 토대를 구축할 것이다. 박노해가 “나의 시작은 나이 패배였다” 그러나 “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고 했듯이 다가오는 봄은 ‘나의 패배를 딛고 참된 시작을 할 때’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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