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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춘설》, 부활을 알리는 봄의 서곡

이상호 | 입력 : 2021/03/15 [09:09]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대표] 지난 겨울은 갇힌 시간이었다. 첫째는 과거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 날씨에 갇혔고, 둘째는 코로나 19로 가족․친지 간의 정이 갇혔으며, 마스크 쓰기로 모든 이의 입과 코도 갇혔다. 셋째는 복합적으로 닥친 불경기와 취업난으로 사람들의 희망도 갇혔다. 그래서인가? 사람들은 빨리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 봄이 오면 뭔가 달라질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제 3월이 되고 봄이 왔다. 코로나 백신 접종도 시작되었다. 희망이 보이는 듯하다. 

 

3월은 봄을 데리고 오는 희망의 달이다. 학교도 긴 겨울방학을 끝내고 개학을 하고 아이들은 새 학년이 되고 입학도 한다. 새들도 경쾌하게 노래한다. 들판에는 냉이 등 새싹들이 움을 틔운다. 삼라만상 모두가 본격적인 생명활동을 시작한다. 그런데 그 봄이 시작할 때 갑자기 눈이 내리고 찬 바람이 불었다. ‘춘설’이라고도 하고 ‘꽃샘추위’라고도 한다. 

 

지난 3월 1일 강원도 지역에 폭설이 내렸다. ‘춘설’이라고 하기는 너무 많은 눈이다. 눈은 휴일에 나들이 갔던 사람들을 길에 가두었다. 차들이 길을 메웠고 길에 갇힌 사람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어야 했다. 자연은 성급하게 밖으로 나왔다며 사람들을 꾸짖는 듯했다. 

 

그런 와중에도 미담이 들렸다. 강원도 양양군 서면 공수전리 이장 박용관 씨는 10개월 된 어린 아기가 차에 갇혀 추위에 떨고 아프다는 말에 마을 주민들과 함께 그들을 도왔다. 급한 대로 차들을 도로변으로 옮기고 차에 있던 열댓 명을 마을 회관과 초등학교로 대피시켰다. 아기 상태가 좋지 않다는 연락을 받고, 무조건 아기를 살리고 봐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마을 회관까지 아기 부모가 역주행해서 차를 몰고 오게 하고 삽으로 길을 내어 집으로 데려갔다. 추위에 언 아기에게 우유를 데워 먹이니 아기의 혈색이 돌았다. 그리고 자기 집에 부모랑 아기를 하룻밤 재우고 보냈다. 다음날 서울에 잘 도착했다며 연신 고맙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애가 아프다는데 살려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했다.(동아일보 2021.3.4.) 나는 이 소식을 접하면서 인간의 내면에 깃든 고귀한 측은지심을 생각했다. 갇힌 마음이 열리는 소식이었다. 

 

춘설은 희망차게 움트는 생명들에게 일시적으로 냉해를 입힐 수 있지만, 부활을 알리는 봄의 서곡 앞에서 춤추는 광대인지 모른다. 그 광대는 봄을 섣부르게 맞이하는 생명들에게 좀 더 단단히 맞이하라는 채찍을 가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강원도 폭설 소식을 들으며 정지용의 시 《춘설》을 읽었다. 그리고 시에서 아름다운 서정과 부활을 소망하는 단단한 마음도 읽었다.

   

춘설

 

- 정지용(1902~1950)-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츰, 

 

새삼스레 눈이 덮인 멧부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얼음 금 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긔롭어라. 

 

웅송그리고 살어난 양이 

아아 꿈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 긔던 고기 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 

 

- 이숭원 주해 『원본 정지용 시집』, 깊은 샘, 2003-

 

정지용의 시를 읽다 보면, 절묘한 언어감각에 감탄한다. 위의 시 《춘설》에서도 언어 감각이 돋보인다. 그래서 좀 읽기 힘들어도 원문 그대로 옮겼다. 《춘설》은 1939년 『문장』지 4월호에 발표되었고, 1941년 간행된 정지용의 두 번째 시집 『백록담』에 실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는 절제된 언어로 구성된 각 연 2행씩 총 7연이다. 시는 춘설 속 봄기운에 샘솟는 자연의 모습과 서정을 섬세한 언어로 표현했으며, 마지막 연에서 드러나는 춘설을 대하는 시인의 마음과 의지에는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고 아름다우면서도 강한 소망이 담겨 있다. 

 

제1연의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라는 구절에서 “시는 놀라움이다”라는 말이 실감 난다. 이 표현은 놀라움의 명귀(名句)라 할 수 있다. 시의 “문 열자 선뜻!”으로 보아 시간적 배경은 아침이다. 아침에 깨어나 문을 열고 먼 산을 바라보았다. 밤사이 눈이 내렸다. 먼 산도 눈으로 덮혔다. 기온은 차다. 아이 같으면 “와 눈이다.”라고 감탄했을 법하다. 그러나 시인은 감탄을 절제하여 “먼 산이 이마에 차라.”라는 절묘한 감탄사로 표현했다. 이 표현에는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가 다르다. 물리적 거리는 “먼 산”에서 말하는 것처럼 멀다. 심리적 거리는 “이마에 차라”에서 말하는 것처럼 매우 가깝다. 눈 덮힌 먼 산이 이마에 와 땋을 만큼 가까이 있다는 매우 촉각적인 심리표현이다. 

 

제2연은 “우수절(雨水節) 들어/바로 초하루 아츰,”은 시간적 배경을 말한다. 제1연에서 ‘춘설‘을 보고 감탄한 날은 바로 우수절 아침이다. 우수절은 대체로 정월에 설이 지나고 시작되며, 봄의 문에 들어선다는 입춘을 보름 지난 날이다. 2021년은 양력 2월 18일이 우수였다. 그리고 다시 보름이 지나면 개구리가 놀라서 깬다는 경칩이다. “우수 뒤에 얼음 갈이”라는 속담이 전해 오는데 이는 ‘얼음이 점점 녹아 없어진다’는 말이다. 우수절은 눈과 얼음이 녹아서 비가 되기 시작하는 절기로 봄이 오고 있음을 의미한다. “아츰”이란 ‘아침’의 당시 방언이다. 

 

제3연의 “새삼스레 눈이 덮인 멧부리와/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는 1연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되새김질은 음식을 정교하게 소화하는 작업이다. “새삼스레 눈이 덮인 멧부리”는 제1연은 “먼 산”의 되새김질이다. “새삼스레”는 ‘평소와 다르다’는 것이고, “멧부리”는 ‘산봉우리’이다. 어제까지 먼 산의 멧부리에는 눈이 없었다. 그런데 아침에 보니 그 멧부리가 평소와 달리 눈에 덮혀 있으니 새삼스럽다.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는 제1연의 “이마에 차라.”의 되새김질이다. 눈 덮힌 멧부리가 차갑게 느껴지고 녹아가니 햇빛을 받아 빛이 난다. 여기서도 1연에서처럼 물리적 먼 거리를 심리적으로 아주 가까이 당겨왔다. 그래서 마치 눈 덮힌 산봉우리를 당겨와 박치기라고 하듯 “이마받이”를 했다. 이제 눈 덮힌 멧부리는 먼 곳이 아니라 바로 내 이마 앞에 있다. 서늘하고 빛나는 춘설의 기운을 몸과 마음으로 온통 느끼고 있다. 

 

여기서 시심을 발화시킨 춘설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춘설은 순우리말로 봄눈인데 대체로 흩날리듯 짧은 시간에 갑작스럽게 추위를 동반하여 내린다. 춘설은 햇살이 비치면 녹아내리며 물기를 머금은 눈은 번들거리고 반짝인다. 사람들은 그런 춘설을 꽃샘추위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가? 정지용의 시 《춘설》을 꽃샘추위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춘설은 꽃샘추위라 할 수 있지만, 꽃샘추위가 곧 춘설은 아니다. 눈이 오지 않고 바람만 불며 기온이 갑자기 내려가는 꽃샘추위도 있기 때문이다. 춘설은 꽃샘추위의 부분집합인 셈이다. 둘 다 봄을 시샘하는 자연 현상에 대한 말이지만 어감은 크게 차이가 난다. 춘설은 현상을 나타내는 한자어이지만, 꽃샘추위는 아름다운 정감을 주는 순우리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지용은 왜 꽃샘추위라 하지 않고 춘설이라 했을까? 앞에서 말했듯이 꽃샘추위가 모두 춘설이 아니듯이, 시심을 발화시킨 것은 꽃샘추위가 아니라 춘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4연에서 6연까지는 제2연의 우수절의 모습을 되새김질한다. 제4연에서 “얼음 금 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흰 옷고름 절로 향긔롭어라.”는 우수절의 모습에 대한 시인의 심상을 표현했다. 우수절은 앞에서 말했듯이 기온이 오르니 얼음이 녹아 갈라지고 눈이 녹아내리는 절기이다. “바람 새로 따르거니”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다는 뜻이다. 그 새로운 바람은 한겨울의 찬 바람이 아니라 찬 기운 속에 따뜻한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다. 시인은 그 바람에서 봄의 향기를 느끼고 있다. 그러기에 그 바람이 배인 “흰 옷고름”이 저절로 향기롭다고 감탄한다. “향긔롭어라.”는 “향기로워라”의 옛 표현이다. 봄의 기운이 바람을 타고 와서 옷고름에 향기로 베었으니 감탄할 수밖에 없다. 

 

제5연에서 시인은 동식물들이 생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겨울 동안 추위에 떨며 몸을 최대한 작게 접어 궁상맞게 움츠리고 있었다. 그들은 봄이 되니 고물고물 옹송그린 모양을 펴며 살아나고 있었다. “웅송그리고 살어난 양이”는 바로 그런 모습의 표현이다. 여기서 “살어난”은 “살아난”이며 “양이”는 “모양이”이다. 이 표현은 마치 사진사가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보여주듯 매우 섬세한 동적 표현이다. 아름답다. 그 모습들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 그러기에 “아아 꿈같기에 설어라.”고 감탄한다. 즉 꿈꾸는 것 같기에 “설어라” 즉 ‘낯설게 느껴진다’고 했다.

 

제6연에서는 우수절의 모습이 시간과 공간으로 확대되어간다.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는 이른 봄 식물들이 생명력을 발휘하는 모습의 총체적 표현이다. 상상 속에서 연못과 호수를 관찰한다. 물고기들이 겨울 동안은 추위에 움츠려 바위틈이나 얼음 밑에서 숨죽이고 있었지만, 이제 밖으로 나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옴짓 아니 긔던 고기 입이 오물거리는”이라고 했다. “옴짓 아니 긔던”은 “움직이지 않던”이며, “고기 입이 오물거리는”은 물고기들이 어린아이처럼 입을 오물거리며 먹이를 먹고 숨을 쉬는 모습이다. 모두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 동적 표현이다. 이제 삼라만상도 봄을 느끼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기에 그 모습 또한 꿈 같이 낯설다. 

 

제7연은 춘설을 대하는 시인의 마음과 다짐을 말하고 있다. 이 표현은 역설적이다. “꽃 피기 전 철아닌 눈에”는 꽃이 피려 하는데 제철이 아닌데 내리는 눈, 즉 꽃샘추위로서의 ‘춘설’을 의미한다. 그 춘설은 오히려 봄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빨리 봄맞이를 하라는 독려로 받아들여진다. 그러기에 시인은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라고 했다. 핫옷은 솜을 두텁게 넣어 만든 겨울옷이다. “도로”는 “다시”라는 말로 시간과 행동의 되새김질이다. “칩고 싶어라”는 “춥고 싶어라”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추운데 왜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라 했을까? 거기엔 자기를 감싸고 있는 어떤 보호막도 벗어던지고 추위(역경)를 감수하며 봄을 온몸으로 맞이하겠다는 결의가 담겨 있다. 그 결의는 삶과 영혼의 부활에 대한 강렬한 소망이다. 

 

지금까지 감상한 정지용의 《춘설》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는 공간의 이동 즉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의 이동이다. 닫힌 공간은 추운 겨울 동안 갇혀 있던 공간이다. 열린 공간은 춘설이 내린 아침 문 열고 바라보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 열린 공간은 문설주에 기댄 듯 서 있는 공간에서 먼 산에 이르기까지 확대되는 공간이며 얼음이 녹고 바람이 불며 미나리와 물고기 등 모든 생명이 웅송거리며 깨어나는 대지로 이동된다. 그렇게 이동된 열린 공간은 생명소생 즉 부활의 공간이다.

 

둘째는 시간과 현상의 되새김질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제1연의 “먼 산이 이마에 차라”는 제3연의 “눈 덮인 멧부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로 되새김질 되고 제2연의 “우수절 들어”는 4연과 5연, 6연으로 되새김질 된다. 이러한 되새김질은 시의 의미만이 아니다. “새삼스레” “철 아닌” “도로” 등과 같은 시어는 시간의 되새김질이다. 시는 이러한 되새김질을 통해 의미를 정교화하고 내용을 강화한다.

  

셋째는 감탄에서 소망으로 이어지는 감각(감성)의 변화이다. “차라”와 “ “이마받이 하다”라는 촉각적 감각과 “향긔로워라”라는 후각적 감각에서 “도로 칩고 싶어라”라고 하는 욕망을 담은 소망의 감각(감성)으로 발전한다. 이것은 여러 감각을 통해 겪은 서정이 소망으로 이어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소망은 기어코 봄을 맞이하겠다는 의지 즉 생명소생(부활)의 공간으로 이동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 감각과 소망은 너무나 맑고 순수하다. 그 부활의 공간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벗어던지는 성찰과 결의가 필요함을 암묵적으로 말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시 《춘설》은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의 이동과정에서 접촉하며 느끼는 시간과 공간에서 나타나는 현상의 되새김질을 통해 느껴지는 맑고 순수한 감각을 통해 생명소생(부활)의 소망에 이르게 된다. 그 생명소생(부활)의 소망은 자연 현상만이 아니라 삶과 영혼의 부활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시를 읽으며 레프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의 소설 『부활』을 떠 올렸다. 

 

네흘류도프 공작은 어느 날 지방 법원에 배심원으로 참석했다. 거기서 그는 매춘부로 살면서 손님에게 독을 먹여 죽이고 돈과 반지를 빼앗았다는 살인과 강도의 혐의를 받는 죄인을 만난다. 그는 죄인의 얼굴을 보다가 깜짝 놀란다. 그녀는 자신이 16세 청년 시절 고모의 집에 놀러 갔을 때, 고모 집에 있던 눈이 검고 생기발랄한 청순하고 아름다운 하녀를 유혹해 임신시킨 뒤 돈 몇 푼 주고 버렸던 여인인 카튜샤 마슬로바였다. 그녀는 그 상처로 매춘부가 되었다. 그녀는 사실 무죄였는데 잘못 판결되어 징역 4년의 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게 되었다. 네흘류도프는 자기 때문에 한 여자가 파멸했다는 깊은 죄의식을 깨닫고 그녀를 구출하고자 한다. 그는 형무소에 찾아가서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고, 변호사를 찾으며,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헛수고였다. 그녀는 결국 다른 죄수들과 시베리아로 이송되었다. 네흘류도프는 귀족 생활을 버리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떠난다. 다행히 카튜샤는 시베리아에서 판결 취소 명령을 받아 자유의 몸이 된다. 이 소식을 들은 네흘류도프는 카튜샤를 찾아가 자유의 몸이 된 그녀에게 진심을 털어놓고 청혼한다. 카튜샤는 마음으로는 죄를 뉘우친 네흘류도프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의 장래를 생각해 정치범인 시몬손과 결혼한다. 네흘류도프는 그녀의 행복을 빌며 성경을 열심히 읽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진실한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다. 카튜샤는 네흘류도프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했지만, 그에게 하룻밤 정조를 주고, 그의 쾌락의 대상이 되어 버려졌기에 타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녀는 매춘부로 살면서도 영혼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진실과 고귀한 영혼만은 잃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앞에서 죄를 뉘우치며 진심을 털어놓는 네흘류도프의 사랑을 믿으며 부활(갱생)의 길을 걷는다. 그녀의 아름다운 부활을 보며 네흘류도프도 새로운 인간으로 부활한다.(레오 톨스토이 저, 박형규 옮김, 『부활1.2』 민음사, 2007)

 

이 소설에서 카튜사와 네흘류도프의 부활(갱생)은 삶의 갱생을 넘어 사랑이 충만한 고귀한 영혼의 부활을 의미한다. 정지용의 시 《춘설》에 깃든 감각과 서정이 너무도 순수하고 맑다. 그리고 거기에 깃든 생명 소생(부활)의 소망 역시 순수하고 맑다. 시 《춘설》에서 생명소생(부활)을 소망하는 모습은 진흙탕의 삶을 살았으면서도 맑은 영혼을 잃지 않으며 부활하는 카튜샤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맑은 영혼을 지닌 아름다운 인간으로 부활하는 네흘류도프를 떠올리게 한다. 

 

죄를 뉘우치고 갱생의 소망과 의지로 사랑을 실천하는 자는 부활한다. 영혼의 생명력을 잃지 않는 고귀한 사랑은 늘 부활한다. 모든 생명체는 고난을 딛고 일어서면 닫힌 세상에서 열린 세상으로 나올 수 있으며 그 열린 세상에서 부활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진실하고 순수한 영혼을 잃지 않는 것이며 생명을 향한 소망에 깃든 의지이다. 

 

춘설이 세상을 덮고 사람들을 길에 가둔 날, 그들을 돕기 위해 동분서주한 사람들의 순수한 측은지심을 생각했다. 정지용의 시 《춘설》을 읽고 톨스토이의 『부활』을 떠 올리며 봄의 방해꾼인 춘설을 통해 역경을 견디며 새로운 생명 부활의 서곡을 느끼는 시인의 소망을 읽었다. 그리고 코로나와 어려운 경제 사회상황에서 힘겨운 삶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열린 공간으로 해방되어 새로운 삶과 영혼으로 부활하기를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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