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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문명에 빠져버린 매화
기사입력  2019/03/26 [11:41] 최종편집    이상호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천안아산경실련대표 이상호 공동대표] 지난 3월 16일 아내와 광양 청매실 농원과 구례 산수유 마을에 다녀왔습니다. 6시도 되기 전에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지요. 선잠을 깬지라 비몽사몽으로 한참을 허덕이다가 눈 앞에 펼쳐진 섬진강 줄기에 정신이 바짝 들었습니다, 어느새 창밖으로 돌려진 또랑또랑해진 시선은 돌아올 줄 몰랐습니다. 무념무상, 그냥 바라보는 섬진강 풍경은 그대로 섬진강(蟾津江)이었습니다. 하동의 쌍계사 벚꽃길, 구례 지리산 산수유 마을, 경상과 전라를 잇는 섬진강 화개장터 의 서정이 물씬 느껴 왔습니다.

    

청매실 농원엔 버스를 대기도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입구에서부터 요란한 음악 소리, 식당과 상점에서 호객하는 소리, 떠밀리다시피 산을 올랐습니다. 산기슭을 가득 메운 매화를 즐기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은 삼삼오오 인증샷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1시간 반, 매화산 전체를 트래킹하기는 부족한 시간이었지요. 점심은 청매실 농원 매실 비빔장으로 비비는 비빔밥을 또 떠밀리다시피 먹었습니다, 와중에 매실 막걸리도 한 잔 했지요.

 

다음 코스인 산수유 마을 길은 주차장이었습니다. 안내는 돌아오는 것이 걱정된다며, 계획했던 산동마을을 포기하고 좀 한적한 현천마을을 택했습니다. 우리 일행은 산수유마을을 다 돌지 못하고 저수지 부근만 돌아 나왔습니다.

    

생각해 보니 꽃을 구경하기 위해 걸었던 거리보다 버스를 타기 위해 걸었던 거리가 더 많았습니다. 피로가 엄습해왔지만, 버스 안에서 며칠 전부터 읽었던 퇴계 선생의 매화시와 농원의 매화를 떠 올리며 나만의 서정에 빠졌습니다. 퇴계의 매화시 중에 望湖堂尋梅(망호당심매:망호당 매화를 찾다)가 가장 마음에 남습니다.

    

望湖當下一柱梅(망호당하일주매) 매호당 아래 한 그루 매화야

幾度尋春走馬來(기도심춘주마래) 몇 번이나 봄 찾아 말 달려왔나.

千里歸程難女負(천리귀정난녀부) 천리 돌아가는 길에 널 지고 가기 어려워

敲門更作玉山頹(고문경작옥산퇴) 문을 두들기고 두들겨 옥산퇴를 이루네

    

옛날 선비들은 매화를 사랑했습니다. 특히 퇴계 선생의 매화 사랑은 유별납니다. 그것은 그가 남기 시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퇴계 선생이 남긴 매화시(梅花詩)는 72제 107수에 이르는데, 말년에 그 가운데서 62제 91수를 정리하여 『매화시첩』을 엮었습니다. 여기엔 그의 70세까지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엮은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퇴계 선생의 매화시를 읽다 보면, 그의 학문에 대한 사랑과 열정, 고향과 연인과 벗에 대한 그리움, 선비의 지조와 절제가 물씬 묻어납니다.

    

위의 시는 퇴계 선생의 슬픔이 서린 시입니다. 퇴계 선생이 위의 시를 쓴 것으로 알려진 1546년 음력 2월, 나이 46세 때 일시 귀향합니다. 퇴계 선생은 관직 생활을 하면서도 귀향 사직소(辭職疏)를 자주 냈는데, 이때의 귀향은 슬픈 귀향이었습니다. 장인 권질의 장사를 지내기 위함이었지요. 그해 5월 병으로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고 고향에 머물던 중, 7월 초엔 사랑하는 아내 권씨를 잃습니다. 퇴계 선생은 깊은 슬픔에 빠집니다. 태어난 지 일곱 달 만에 아버지를 잃고 37세엔 어머니를 잃었는데, 이제 장인과 사랑하는 아내마저 잃었으니 얼마나 슬플까요.

    

이제 그의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 몸과 마음이 허전하기 이를 데 없겠지요. “망호당 아래 한그루 매화야 봄 찾아 몇 번이나 말달려 왔나.” 봄은 고향이며 사랑하는 사람이며 꿈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천리밖으로 떠나갑니다. 난여부(難女負) 즉 어려워도 마음속에 있는 매화, 마음 밖에 있는 매화를 모두 지고 가고 싶습니다. 슬픔을 가눌 길 없어 술에 취해 옥산퇴(玉山頹)를 이룹니다. 진짜 술에 취한 것이라기보다 가슴에 담은 그리움에 취해 옥산이 무너지는 것처럼 쓰러진 것입니다. 슬픔의 절정입니다. 퇴계 선생의 가족 사랑은 지극하였다 합니다, 이제 모든 가족을 잃었으니 가족에 대한 간절함, 그리움이 절정에 다다른 것이겠지요.

    

퇴계 선생에게 매화는 삶과 사랑, 학문과 연민을 관조(觀照)하는 대상이었습니다. 사물과 풍경, 특히 꽃은 관조할 때 더욱 아름답습니다. 관조란 일을 멈추고 무엇인가를 자세히 바라보며 느끼는 행위입니다. 거기에는 이익이나 목적의식이 없고, 한가함과 사랑스러움과 그리움 등의 서정만 남습니다. 관조는 대상과 자아의 벽을 넘어 새로운 세계로 나가게 하고 내적 가치와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그렇게 깨달은 자아는 삶을 한층 성숙하게 하고 자아의 영역을 확장하여 미적인 쾌감과 행복과 자유를 줍니다. 그것은 그리움이나 슬픔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나가게 하는 정서이며 힘입니다. 퇴계 선생은 매화를 관조함으로 슬픔을 딛고 자아를 확장하려 애쓰는 것입니다.

    

나의 매화 축제 관람은 관조를 잃은 것 같습니다. 사람과 차량, 시간에 떠밀렸기 때문입니다. 뜰에 홀로 핀 매화, 추운 날 고즈넉한 한 기슭에 홀로 핀 매화를 여유를 가지고 볼 때 진정한 관조가 있을 진데, 산 하나를 뒤덮은 풍성한 매화를 보면서 환호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너도나도 인증샷에 여념이 없는 모습엔 관조의 여유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문명의 탓입니다.

    

문명은 대량 생산과 상업화와 유행을 가져왔지요. 매화를 온 고을에 심을 수 있는 것도 문명의 선물입니다. 연구를 통해 묘목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지요. 전국에서 차를 몰고 몰려들 수 있는 것도 교통과 통신, 도로의 발달이 준 문명의 선물이지요. 그런데 그 문명의 선물이 관조의 세계를 빼앗아 갔다는 아쉬움을 느낍니다.

    

옛날 선비들에게 매화는 오상고절(傲霜孤節)입니다. 서릿발 속에서 피어난 외로운 꽃으로 어떤 핍박과 역경에서도 자신의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기개입니다. 여인에게 매화는 순결과 정조의 지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오상고절을 논하거나, 남녀 불문하고 순결과 정조를 따지는 것은 장롱 속에 든 골동품을 꺼내는 것처럼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혼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조와 절개, 순결과 정조를 무너뜨린 것도 문명의 선물이며 병폐이기도 합니다. 문명은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었고, 그 해방은 순결과 정조도 해방시켰지요.

 

또 문명은 실리에 촛점이 주어집니다. 문명은 상업주의와 자본화를 가져왔고 기업을 번성하게 했습니다. 매화농원이 거대하게 형성될 수 있었던 것도 자본화와 기업화의 덕입니다. 그래서 보다 많은 사람에게 매화와 매실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지요. 우린 이제 매화와 매실을 보면서 관조보다는 그 효능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연인들도 인증샷에 여념이 없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매화를 보면서 관조보다는 꽃의 현상과 유희만 즐기는 것 같습니다.

    

매화가 문명에 빠진 것 같았습니다. 문명에 빠진 매화는 고결한 지조나 절제, 순결과 정조, 관조를 통한 자아의 깨달음보다는 꽃의 현상과 유희가 가득합니다. 문명사회에서 문명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문명은 퇴행이 없습니다. 다만 문명 속에 사는 우리가 매화의 정신과 의미만 아니라, 사람 사는 삶의 의미를 관조할 수 있는 여유와 서정까지 문명의 웅덩이에 빠뜨리지 말기를 바랄 뿐입니다.

    

설중매(雪中梅)라 했던가요? 퇴계 선생의 望湖堂尋梅(망호당심매 : 망호당 매화를 찾다)를 다시 읽어 봅니다. 아울러 김상옥(1920~2004)의 홍매(紅梅)를 읽으며 선구자의 ‘선연한 상처’에 ‘내 영혼 스스로 입 맞추는’ 그런 고귀한 영혼을 떠 올립니다. (얼음 밑에/개울은 흘러도//남은 눈 위엔/또 눈이 내린다.//검은 쇠붙이/연지를 찍는데//길 떠난 풀꽃들/코끝도 안 보여//살을 찢는 선지/선연한 상처//내 영혼 스스로/입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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