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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서러운 사랑의 사유와 몰카에 강탈당하는 사랑

이상호 | 입력 : 2019/04/17 [09:23]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시(詩)로 세상 읽기=천안아산경실련 이상호 대표] 어느 가수가 성관계 동영상을 여성 몰래 찍어 단체 카톡방에 올려 유포한 사건으로 세상이 들끓습니다. 이 사건은 나에게 사랑과 섹스에 대하여 새롭게 성찰하게 하는 계기를 주었습니다. 며칠간 사랑과 섹스를 은유한 시도 읽었습니다. 그 중 박정대(1965~ )의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기억의 동편 기슭에서

그녀가 빨래를 널고 있네. 하얀 빤스 한 장

기억의 빨랫줄에 걸려 함께 허공에서 펄럭이는 낡은 집 한 채

조심성 없는 바람은 창문을 흔들고 가네. 그 옥탑방

 

사랑을 하기엔 다소 좁았어도 그 위로 펼쳐진 여름이

외상장부처럼 펄럭이던 눈부신 하늘이, 외려 맑아서

우리는 삶에,

아름다운 그녀에게 즐겁게 외상지며 살았었는데

    

내가 외상졌던 그녀의 입술

해변처럼 부드러웠던 그녀의 허리

걸어 들어갈수록 자꾸만 길을 잃던 그녀의 검은 숲 속

그녀의 숲 속에서 길을 잃던 밤이면

달빛은 활처럼 내 온몸으로 쏟아지고

그녀의 목소리는 리라 목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려 왔건만

내가 외상졌던 그 세월은 어느 시간의 뒷골목에

그녀를 한 잎의 여자로 감춰두고 있는지

 

옥타비오 빠스를 읽다가 문득 서러워지는 행간의 오후

조심성 없는 바람은 기억의 책갈피를 마구 펼쳐 놓는데

네 아무리 바람 불어간들 이제는 가 닿을 수 없는, 오 옥탑 위의

옥탑 위의 빤스, 서럽게 펄럭이는

우리들 청춘의 아득한 깃발

 

그리하여 다시 서러운 건

물결처럼 밀려오는 서러움 같은 건

외상처럼 사랑을 구걸하던 청춘도 빛바래어

이제는 사람들 모두 돌아간 기억의 해변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물결 위의 희미한 빛으로만 떠돈다는 것

떠도는 빛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

    

시인은 옥타비오 빠스(Paz, Octavio, 1914.3.13.~1998.4.19., 멕시코의 시인, 비평가. 1990년 노벨문학상)를 읽다가 기억의 동편을 더듬습니다. 추억의 공간에 사랑을 나누었던 여인과 그때의 풍경을 떠 올립니다. 낡은 이웃집 옥탑방의 여인이 빨래를 널고 있었는데 조심성 없는 바람이 유독 그 한 장의 빤스를 흔들었던가 봅니다. 그때 시인의 마음도 흔들렸을테고요. 빤스가 준 연정은 분명 섹스 욕구이며, 그 섹스 욕구가 사랑으로 진화되었을 겁니다.

    

누가 먼저 인연의 손을 내밀었는지는 모르지만, 비좁은 옥탑방에서 사랑을 나누며 남자는 여자의 숨결 속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입술을 탐닉하고 해변처럼 부드러운 허리를 감으며, 깊은 흐느낌으로 하나가 됩니다. 남자가 여자의 <검은 숲속>으로 걸어가면, 여인은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리라 소리처럼 아름답게> 흐느낍니다. 여인은 조건도 없이 남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사랑은 외상이었습니다. 남자는 그 사랑을 기억의 동편 기슭에 감춰두고 있었는데 옥타비오 빠스를 읽으며 회상되고 말았습니다. 뜨거우면서도 순수했던 사랑, 그러나 옥탑 위의 빤스도 그 입술도 청춘도 추억입니다. 사랑의 외상값을 갚을 길도 없습니다. 그래서 서럽습니다.

    

어쩌면 사랑은 근원적 충동이며 섹스 욕망입니다. 옛날에는 사랑해야 섹스를 허락하는 것으로 여겼지만, 요즈음은 사랑보다는 섹스를 위한 만남이 많은 듯합니다. 전통적으로는 사랑의 합일점에 섹스가 있습니다. 결혼은 섹스의 법적인 허가임과 동시에 섹스 자유의 구속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언제나 섹스할 자유가 주어지지만, 다른 사람과는 섹스가 금지되는 섹스 자유의 구속이지요. 만약 허락되지 많은 상대와 섹스를 하면 사랑의 파멸을 가져옵니다. 결혼은 한편으로 사랑과 섹스에 대한 쌍방 구속의 언약입니다.

    

섹스를 욕망의 노예로 볼일이 아니라면, 관점에 따라 남녀가 성숙해지는 계기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전통적으로 일본에서는 요바이(夜道い)란 풍속이 있었습니다. 옛날 일본 총각들은 한밤중에 평소 점찍어 두었던 처녀의 집에 몰래 들어가 하룻밤을 즐깁니다. 결혼을 염두에 둔 여자도, 업소 여자도 아닌 일반 가정의 처녀입니다. 돈을 주지도 않습니다. 단 남의 눈을 피해 은밀히 진행하여야 하며 여자도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여자 부모가 인기척을 알아도 모르는 척했습니다. 부모들은 딸을 요바이하는 총각이 없으면 ‘내 딸이 매력이 없는가’하고 걱정을 했답니다. 결혼한 남녀는 순결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요바이’한 사실을 일체 발설 하지도 않았답니다. 만약 발설하면 이혼감이었다지요. 일본 남녀들은 그것을 성숙의 과정으로 여겼답니다. 그러나 이 풍속은 에도막부 시대에 유교 이념을 받아들이면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희소한 것은 신비스럽습니다. 옛날엔 남녀가 만나 사랑을 나눌 시간과 공간도 부족했지요. 그래서 사랑과 섹스는 신비스러웠지요. 섹스가 욕망이 아니라 동경일 때, 자유가 아니라 금기일 때, 풍요가 아니라 가난일 때, 희소가치가 있어 신비스럽습니다. 그러나 문명사회에선 시간과 공간이 풍부하여 신비함보다는 욕망의 충족과 유희로 이어지는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문명은 사랑의 방식에도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문명은 인간에게 성의 개방과 성적인 유희를 더욱 가능하게 했지요. 연애의 자유와 곳곳에 있는 숙박업소 등은 사랑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그 폐해도 막대합니다. 사랑의 자유는 불륜을 양산하고, 또 다른 불안과 구속을 만들어냈습니다, 남의 사랑 몰래 훔쳐보기를 넘어 몰래카메라를 이용하여 디지털 세계에 마구 퍼트리는 파렴치함이 발생했지요.

    

몰래카메라는 분명 디지털 문명의 야만입니다. 과거에도 사랑 훔쳐보기는 있었습니다. 신혼부부가 첫날밤을 치를 때 동네 처녀들이 신혼 방문에 구멍을 내고 떼를 지어 훔쳐보는 풍습입니다. 그것은 허락받은 훔쳐보기이며, 그날 밤으로 한정되는 일종의 성교육이었습니다. 그런데 문명화되면서 몰카로 남의 사랑을 훔쳐 온 세상에 퍼트리며, 상업화하고 유희로 즐기는 야만이 생겼지요. 남의 사랑을 몰래 촬영한 영상이 디지털 세계에 가면 날개가 달려 급속도로 퍼져 남의 인격을 파멸합니다.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몰래카메라 범죄는 2016년 기준 5185건으로 2011년 1523건에 비해 5년간 3배 이상 늘었습니다. 해가 갈수록 늘어납니다. 사랑도 두려운 세상입니다.

 

몰래카메라의 두려움은 사랑을 마음대로 나누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데이트유목민]으로 만들었습니다. 데이트 유목인은 자기들의 섹스장면이 언제 찍힐지 모르는 불안감에 폐건물, 계단, 창고, 고급 호텔, 친구 자취방 등 안전한 곳을 찾아다니는 섹스유목민입니다. 그래서 자취방을 친구에게 일정 기간 임대하는 젊은이들도 있답니다. 그들은 데이트할 공간이 없어 강둑, 산소 등을 찾아다니던 전통적 데이트 유목민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다시 위의 시<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으로 돌아가면, 시인은 <외상처럼 사랑을 구걸하던 청춘도 빛바래어 이제는 사람들 돌아간 기억의 해변에서> 옛사랑의 추억을 사유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금기시되었을 낯선 남자를 자기 방에 들여 사랑을 허락한 여인 대한 고마움, 이제는 결혼하여 그 연인에게 돌아갈 수 없는 숙명, 이 모든 것들이 기억의 동편에서 솟아남은 사실 조건 없이 사랑을 준 여인에 대한 미안함과 다시 찾고 싶은 그 진한 사랑의 사유일 것입니다. 그래서 상상 속의 그 깃발(빤스 한 장)은 더욱 서럽게 펄럭이는 것입니다.

    

사랑과 섹스, 쾌락과 유희에도 사유가 필요합니다. 사유는 자신의 사고와 행위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며 사회적으로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를 점검할 줄 아는 자기 성찰입니다. 사유가 있어야 상대를 존중하고 진정으로 사랑하고 절제된 쾌락과 유희가 있게 되지요. 절제는 정열적이지만, 존중이 깃든 것입니다. 적어도 시인의 사랑에는 사유가 깃들여 있습니다. 그러나 섹스가 중심이 된 현대의 사랑은 사유가 빠진 쾌락과 유희만 있는 것 같습니다. 문명은 사유보다는 감각과 쾌락과 욕망을 우선하는 경향으로 길들이고 있지요.

    

몰래카메라로 남의 사랑을 훔쳐 디지털 세계로 날려 보내는 사람들에겐 사유란 전혀 찾아볼 수 없지요. 사유 없는 인간은 수많은 유태인을 학살했던 히틀러의 충직한 부하 아이히만처럼, 자신에겐 성실할지 몰라도 많은 타인에게 상처를 줄 때가 많습니다. 사실 자신의 삶과 행위에 대한 ‘무 사유’ 즉 ‘사유의 결핍’상태에 이르면, 그의 삶은 묵시적으로 타인에게 엄청난 상처를 줄 때가 있습니다. 사유(자기 성찰) 없는 인간 또한 문명이 양산한 야만의 일종일 것입니다. 몰래카메라로 남의 사랑 퍼 나르기를 하는 자들은 그 행위가 인간을 어떻게 파멸하고 어떤 범죄에 이르는가를 사유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분명히 사랑과 섹스에도 사유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존중과 인격이 살아 숨 쉬는 사랑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위의 시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은 우리에게 사랑을 사유할 것을 권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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