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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너”를 살해하는 세상, ‘참된 나’를 찾아 ‘우리’로 거듭나길 바라며
기사입력  2019/05/15 [16:33] 최종편집    이상호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이웃과 화합하지 못하고 갈등을 겪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줄에 매달려 고층 아파트 도색작업을 하면서 핸드폰 음악을 크게 틀어 낮잠을 방해했다고 옥상에 올라가 도끼로 밧줄을 잘라 떨어져 죽게 만든 사건이 큰 충격이었는데, 2019년 5월 4일 오후 10시 40분경 세종시 고운동 아파트에서 층간소음 관련 살인미수사건은 그간의 층간소음 관련 사건과는 달라 또다른 충격입니다. 가해자 A씨의 범행 동기가 ‘평소 층간소음으로 피해를 봐 벌인 일'이라지만, 대체로 층간소음 갈등은 아래층에 사는 사람이 위층에 있는 사람에게 가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피해자 B씨는 14층에 살고 가해자 A씨는 15층에 살고 있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정국(政局)은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대치 정국입니다.

    

저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이 ‘참된 나’를 잃어버리고 내안에 ‘너’를 두지 못하고 살해하며, ‘우리’안에 함몰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며칠을 두고 읽은 시가 있습니다. 박노해(1957~ )의 <인다라의 구슬>입니다. 좀 길지만 전문을 옮겨 봅니다.

 

인다라의 구슬

    

인다라의 하늘에는 구슬로 된 그물이 걸려 있는데, 구슬 하나하나는 다른 구슬 모두를 비추고 있어 어떤 구슬 하나라도 소리를 내면 그물에 달린 다른 구슬 모두에 그 울림이 연달아 퍼진다 한다 – 화엄경-

    

작은 연어 한 마리도 한 생을 돌아오면서 안답니다

작은 철새 한 마리도 창공을 넘어오면서 안답니다.

지구가 끝도 없이 크고 무한정한 게 아니라는 것을

한 바퀴 크게 돌고 보면 이리도 작고 여린

푸른 별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구 마을 저편에서 그대가 울면 내가 웁니다

누군가 등불 켜면 내 앞길도 환해집니다

내가 많이 갖고 쓰면 저리 굶주려 쓰러지고

나 하나 바로 살면 시든 희망이 살아납니다

    

인생이 참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세상이 참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한때는 씩씩했는데. 자신만만했는데.

내가 이리 작아져 보잘 것 없습니다

아닙니다

내가 작은 게 아니라 큰 세상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관계 그물이 이다지도 복잡 미묘하고 광대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도 인생도 나도

생동하는 우주 그물에 이어진 작으나 큰 존재입니다

    

지금은 `개인의 시대`라고 합니다

우주 기운으로 태어나 우주만큼 소중한 한 생명.

한 인간이 먼저. 내가 먼저입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내 한 몸 바치는 것을 미덕으로 교육받아 온

‘개인 없는 우리’에서

자유롭게 독립하여 주체적인 개인들의 연대-

‘개인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정보화 시대`라고 합니다

세계 구석구석을 연결하는 거대한 정보 네트워크가

구슬처럼 빛나는 개개인을 하나로 엮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인다라의 구슬처럼

지구 마을의 큰 울림을 만들어가는 주체입니다

    

새벽 찬물로 얼굴 씻고 서툰 붓글씨로 내 마음에 씁니다

    

오늘부터 내가 먼저!

내가 먼저 인사하기

내가 먼저 달라지기

내가 먼저 정직하기

내가 먼저 실행하기

내가 먼저 벽 허물기

내가 먼저 돕고 살기

내가 먼저 손 내밀기

내가 먼저 연대하기

무조건 내가 먼저

속아도 내가 먼저

말없이 내가 먼저

끝까지 내가 먼저

 

- 박노해 『사람만이 희망이다』( (해냄,1997, 22~24쪽)

    

이 시는 모두가 ‘관계의 끈’으로 연결된 세상에서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박노해의 본명은 박기평(1957~)입니다. 박노해는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에서 따온 것이라 합니다. 그가 1984년 시집 『노동의 새벽』을 발표하자, 그의 시는 노동운동가들의 ‘뜨거운 심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시를 발표하고 노동운동을 하면서 자신을 숨겼기에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1991년 3월 10일 국가안전기획부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고, 백태웅 등과 함께 ‘사노맹 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7년간 수감 생활을 했습니다. 1998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하기 전해인 1997년 시․산문집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펴냄으로써, 시와 정신세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변절자라 하기도 했지요. 『사람만이 희망이다』에는 <인다라의 구슬>처럼 과거에 그가 노동운동가로 부르짖었던 투쟁과 혁명성이 아닌, ‘참된 나’의 발견과 ‘조화와 화합의 공동체’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시가 투사의 얼굴이었다면 『사람만이 희망이다』 특히 <인디라의 구슬>은 구도자의 얼굴입니다.

    

모든 인간의 사유와 삶은 유동성이 있어 진화의 과정을 겪으며 성숙합니다. 다만 그 축은 지켜지겠지요. 축은 본질이고 정체성입니다. 유동성은 본질의 발현입니다. 박노해의 구도자적인 삶의 인식은 시(詩)<경계-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말 것, 현실이 미래를 잡아먹지 말 것, 미래를 말하며 과거를 묻어 버리지 말 것, 미래를 내세워 오늘 할 일을 흐리지 말 것>에 잘 나타나듯이 인간적인 바른 삶이었을 겁니다. 시대가 변하여 그는 ‘민주화 운동의 선구자’로 사면 복권되었지만,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면서 새로운 길을 떠났습니다. 지구촌 곳곳, 분쟁과 가난의 현장을 찾아가면서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의 사유와 삶은 유동성과 진화의 과정을 겪으며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시 <인다라의 구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인다라의 그물에는 씨줄과 날줄이 만나는 지점에 구슬이 달려 있답니다. 그물은 삼라만상 우주이며, 인간 세상입니다. 모두 ‘관계의 끈’인 인연으로 맺어진 것이지요. 시인이 시의 앞에서 “인다라의 하늘에는 구슬로 된 그물이 걸려 있는데, 구슬 하나하나는 다른 구슬 모두를 비추고 있어 어떤 구슬 하나라도 소리를 내면 그물에 달린 다른 구슬 모두에 그 울림이 연달아 퍼진다 한다”고 전제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작은 연어 한 마리도 한 생을 돌아오면서, 작은 철새 한 마리도 창공을 넘어오면서, 지구를 한 바퀴 크게 돌고 나면, 무한이라 생각했던 지구도 푸른 별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한 것처럼, 세월의 풍파를 겪으면서 삶은 ‘나와 너, 우리’라는 인연으로 얽혀진 ‘좁은 동네’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지구 마을 저편의 울음도 나의 울음이 되고, 누군가의 등불이 나에게 빛’이 되기도 하지요. 그러니 ‘내가 바로 사는 것은 남에게는 시든 희망을 살리는 힘’이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마음대로 될 것 같았던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세상도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한때는 세상의 중심처럼 씩씩하고 용감했지만, 지금 보니 세상은 참으로 크며 그 안에 나 또한 ‘작으나 큰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새로운 자아의 성찰과 발견, 즉 폭풍우가 지난 후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처럼 삶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며 희망이라 여겨집니다,

    

개인은 ’우주 기운으로 태어났기에 우주만큼 소중한 한 생명‘입니다. 고도로 정보화된 문명은 인간의 개인성을 확대시켰지요. 그래서 시인은 과거에는 국가와 민족을 항상 우위에 둔 ‘개인 없는 우리’의 시대였지만, 이제는 개개인이 ‘자유롭게 독립하여 주체적인 개인들의 연대’를 즉‘개인 있는 우리’의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개개인은 <인다라의 구술>처럼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로 지구의 큰 울림이 되는 ‘우리’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 일을 ‘내가 먼저 시작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시인은 끊임없이 ‘참된 나’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참된 나(우주의 기운을 받은 소중한 생명)”는 ‘너’의 존재를 인정하고 ‘너’를 내 안에 받아들이며,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 아름다운 감정을 나눌수 있는 존재입니다. ‘참된 나’는 결코 ‘나’를 세우기 위해 ‘너’를 무너뜨리지 않으며, ‘나’를 ‘우리’속에 함몰시키지도 않습니다. 단지 빛나는 구슬처럼 ‘우리’속에서 조화롭게 어울릴 뿐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문명의 시대에 우린 자유와 평등,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성을 신장시켜 왔습니다. 문명은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을 확대시켰지만, 정신적인 시간과 공간을 확대시켰는지는 의문입니다. 개인이 소중한 만큼 타인도 존중하며, ‘나와 너’는 아름다운 ‘우리’로 발전되어야 하는데, 문명 속의 ‘나’는 내안의 ‘타자’를 살해하는 것 같습니다. 갈수록 각박해지고 인심은 사나워집니다. 공동체 속의 ‘우리’를 잃어갑니다.

    

인간이 <인다라의 구슬>처럼 얽혀 산다는 것은 소통을 통한 ‘이해와 협력의 삶’을 말합니다. 소통은 문명의 위대한 산물입니다. 전통사회에서의 소통은 주로 얼굴을 대하거나 편지 등으로 하였지만, 문명은 얼굴을 대하지 않더라고 소통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전통사회에선 마을 전체가 ‘우리’였습니다. 모든 것을 이웃과 나눌 줄 알았고 협력하면서 살았습니다. 어지간한 정도는 서로 이해하고 감쌌지요. 한계는 있었지만, 거기에는 ‘정서적 소통’이 있었지요. 그러나 현대는 문명의 특산물인 아파트를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이 밀집해 사는데도 ‘나’만 존재하지 ‘너’와 ‘우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정서적 소통’도 사라졌지요. 문명사회의 소통은 상당수가 ‘나 홀로 소통’입니다. 옆집, 윗집에 누가 사는지 알려고하기보다는 숨기고 무관심합니다. 거기다가 조금만 불편해도 참지 못하고 화를 발산하는 경우가 많지요. 층간소음 갈등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물리적으로는 이웃이지만, 마음으로는 결코 이웃이 아닙니다. 이제 가까이 산다고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정없는 이웃’이랄까? 문명이 가져다준 또 다른 이웃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개인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강한 방어기제로 내안에 너를 두지 못하는 왜곡된 개인성의 발현입니다. 그러니 나를 귀찮게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지요. 그렇기에 줄에 매달려 도색작업 중 무료함을 달래려고 틀어놓은 핸드폰 음악이 시끄럽다고 옥상에 올라가 밧줄을 도끼로 잘라 떨어져 죽게 만드는 파렴치범죄도 저지르는 것 아닐까요?

    

내 안에 너를 두지 못하는 것은 학교에서도 심각하게 나타났습니다. 바로 학교 폭력과 집단 따돌림 등이지요. 그것 역시 ‘왜곡된 개인성’의 표출입니다. 어릴때부터 ‘나만 소중한 존재’로 여겨오다보니 성장하여서도 자기밖에 모르는 것이지요. 따라서 자기의 기분에 맞지 않으면 배척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도 소통이 부재 되었지요. 내 안에 너를 둘 수 있는 ‘참된 나’를 갖지 못한 탓입니다.

    

지구촌이 하나 된 세상에서 ‘참된 나’를 갖지 못하여 ‘내안의 너’를 살해하는 모습은 한국 정치에서 심각하게 나타납니다. 모든 정치는 ‘협상의 법칙’ 위에 존재하여야 건강합니다. 그 협상의 법칙에는 소통을 통한 양보와 타협이 필수적입니다. 박노해가 <인다라의 구슬> 말미에서 실천을 강조했듯이, ‘내가 너에게 먼저 다가가는 미덕’이 전제되는 일입니다. 민주주의는 ‘나’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너’도 소중하며, 개개인이 빛나는 ‘우리’을 인식하는 가운데 만들어지는 공동체 정신입니다. 따라서 국민의 자유와 행복, 번영은 그 어떤 절대적인 이념도 초월해야 합니다. 만약 정치가 진보니 보수니 하는 이념의 틀에 갇히면 그 안에 가장 소중한 국민은 사라집니다. 또한 자기 진영의 이념과 도덕적 틀에 갇히고 권력화되면, 배타성의 성을 쌓게 되지요. 그러면 파시즘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도덕과 정의는 권력에 종속되어 비참한 사회가 됩니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는 ‘나’만 존재하기 위하여 ‘너’를 무너뜨리며 ‘우리’안에 ‘나’를 함몰시키고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인들과 정당을 보면,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진정한 개인은 없습니다. 자기 당의 이익과 정책을 위해 다른 당과의 협상보다는 무조건 굴복시키려는 정치를 합니다. 또한 서로 철저한 방어기제에 의한 공성을 쌓고 비난하면서 공성전을 벌이고 있지요. 공격과 방어의 연속입니다. 정당이나 권력이 참된 정당과 권력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당 소속의원들이나 관련 정치인 개개인이 구슬처럼 빛나며 각자의 소리를 냄으로써, 오케스트라처럼 하모니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 정치는 나를 세우기 위해 너를 파괴하며 나를 지키기 위해 너를 공격하는 대립 정치만 보여 줍니다. 여당의 선거법 처리를 위한 패스트트랙의 강행이나 야당의 지속적인 장외 투쟁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원래 민주정치는 시인이 말했듯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중심에 두고, 자유롭게 독립된 주체위에 세워진 ‘개인 있는 우리’의 정치여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인에게는 개인보다는 정당만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당론으로 정해지면 정치인 개인은 그 안에 함몰되고 반대 목소리를 일체 내지 못하며(스스로 포기) 권력의 중심에 모두가 집결하여 구호를 외치는 동원군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정치와 정당은 민주적이라기보다는 보스적입니다. 한 개인의 정치적 신념과 철학은 ‘개인 있는 우리’가 아닌 ‘정당’이라는 닭장같은 ‘우리’안에 갇혀 버려 NO(아니오)를 한마디도 못하게 되어 있는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이는 개인의 정치적 양심을 스스로 버리는 일이기도 하지요. 이렇다보니 한국정치는 투쟁의 연속입니다. 거기에는 국민이란 가장 소중한 ‘우리’보다는 정당의 이익이라는 ‘치졸한 나’만 존재합니다.

    

다시 <인다라의 구슬>을 봅니다. 인연의 끈으로 얽힌 세상에서 나는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 것인가요. 첨단 문명의 정보화 사회는 소중한 개별존재들의 연합과 융합으로써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연합과 융합을 창조의 근원이라고 강조합니다. 연합과 융합은 인간으로 말자하면, 소중한 개개인인 ‘나’와 타자인 ‘너’가 연합하여 아름다운 ‘우리’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합과 융합은 창조와 발전의 원천이지요. 여기엔 필히 소통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이 ‘내’안에 ‘너’를 두지 못하고 ‘우리’를 파괴하며, 때로는 나와 너를 닭장같은 ‘우리’ 속에 가둬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나는 많은 사람이 ‘참된 나’를 발견하지 못한 탓이라 여깁니다.

    

한국인과 한국 정치에 또 희망을 걸어봅니다. 박노해 시인이 바랐던 “우주 기운으로 태어나 우주만큼 소중한 생명”인 ‘나’가 타자인 ‘너’를 받아들임으로 “자유롭게 독립하여 주체적인 개인들의 연대”인 ‘개인 있는 우리’를 만들어, “사람만이 희망”인 세상을 만드는 주체적인 개인, 주체적인 정치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개개인이 ‘참된 나’를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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