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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주는 사랑에서 얻는 행복, 치매와 문명병 치유의 명약

이상호 | 입력 : 2019/05/27 [09:05]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공동대표] 며칠 전 뉴스에서 본 예산의 최대식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가슴을 찡하게 했습니다. 1929년생인 최대식 할아버지는 현재 91세로 아내의 치매약을 타러 보건소에 갔다가 요양보호사에 관한 정보를 듣고 치매를 앓는 아내를 간호하기 위해 240시간의 교육을 이수하고 시험에 도전하여 최고령 합격자가 되었답니다.

 

요양보호사의 일은 치매나 중풍 등 노인성 질환으로 스스로 생활이 어려운 노인들을 위해 신체 및 가사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나이 91세면 자기 몸도 홀로 관리하기 힘들 텐데, 아내를 간호하겠다는 일념으로 힘든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시험에 도전하여 합격했다는 것은, 지극한 아내 사랑과 지속적인 자기 관리의 증거입니다. 그분은 분명 사랑할 줄 아는 노인이었습니다. 사랑하기에 치매 극복도 쉬워질 것이며 부부의 노년도 더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며, 행복은 사랑을 주는 데서 얻는 보람입니다. 나는 이 소식을 접하면서 유치환의 [행복]이란 시를 떠올렸습니다.

    

행복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연연한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이 시는 1953년 ‘문예’지에 실렸답니다. 어린 시절 풍경이 떠오릅니다. 1950년대는 사랑을 전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전화기는 관공서나 부잣집 외에는 없었고, 급한 경우는 전보를 이용했습니다. 그러니 편지는 중요한 통신수단이었습니다. 그때 편지는 어떨 때는 일주일도 걸렸고, 오지는 한 달도 걸렸지요. 그래도 우체국은 사랑하는 사람, 그리운 사람에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최고의 기관이었습니다. 급하면 인편을 이용했지요. 가끔 여동생이나 남동생, 후배나 친구가 편지 배달부 역할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기쁘고 슬픈 사연, 사랑의 가슴앓이를 편지와 전보지에 담아 보냈습니다. 어떤 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어떤 이는 만족한 얼굴로 발길을 돌립니다. 그래도 사랑을 전한 사람은 꽃처럼 활짝 핀 얼굴로, 설레는 가슴을 안고 발길을 돌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편지의 애절함 만큼 순조롭지 않기도 했습니다. 삶과 시간과 공간적 제약에 쫓기는 사람일수록 사랑의 마음은 더 조급하고 애틋하여 답장을 기다릴 겨를도 없이 또 편지를 보냅니다.

    

시[행복]은 청마 유치환(柳致環, 1908~1967)의 젊은 시절인 통영여중 교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08년 거제에서 태어난 청마는 통영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통영은 그의 시심의 고향일 겁니다. 일제강점기 때 5년간 만주에서 생활하다가 광복 후 통영으로 돌아와 통영여중에서 국어 교사를 했습니다. 그때 한복을 단아하게 차려입은 가사 선생이었던 시조 시인 정운 이영도를 보고 단번에 사랑에 빠집니다. 청마는 서른여덟 살의 유부남이었고, 정운은 결혼한 후 스물한 살에 남편과 사별을 하고 딸 하나를 키우는 스물아홉 살의 청상과부였습니다. 청마는 1947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정운에게 애절한 사랑의 편지를 보냈답니다. 자유연애나 남편을 사별한 여인이 함부로 개가하지 않던 시절에, 정운의 마음을 돌리기란 어림도 없었습니다. 청마의 편지는 3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졌고 드디어 정운의 마음을 조금은 돌렸던 것 같습니다. 둘은 잠시의 만남이 있었지만, 당시로선 떳떳하지 못한 만남이었던지 이어지지 못했답니다. 그 후에도 청마는 1967년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무려 20여 년을 한결같이 정운에게 사랑 편지를 보냈답니다. 청마의 정운을 향한 편지는 한국전쟁 이전 것은 전쟁통에 사라지고, 그 이후에 써서 보관한 것만 5,000여 통에 이른답니다. 1967년에 ‘주간한국’에서 이 소식을 듣고 그중 200통을 간추려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서간집을 발간하였습니다.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는 애틋한 사랑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청마를 조강지처를 두고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홀린 미친 사람이라고 욕할 것입니다. 그러나 청마의 사랑과 행복을 향한 순결한 마음은 두고두고 빛을 발휘합니다. 나는 이 시를 ‘진정한 사랑과 행복은 아낌없이 주는 데서 온다’는 잠언으로 받아들입니다.

    

시는 사랑을 외치듯 합니다. 어떤 시집에는 시 앞의 하이픈(-)을 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이픈(-)은 음악의 못갖춘마디처럼 첫 구절부터 반 박자쯤 쉬고 출발합니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한숨도 쉬었을 것이고 마음을 가다듬고 망설이다가 사랑하는 마음이 극에 달하여 마음을 추스르느라 애쓰기도 했을 것입니다.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의 “오늘도”에서 보듯이 사랑 편지는 매일 보냅니다. 오래된 시다 보니 ‘환희’를 ‘훤희’로 표기한 시집이 있는데, ‘환하다’와 ‘훤하다’는 다른 의미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애틋한 마음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애틋한 마음도 헤아립니다. 그러기에 저마다 숱한 사람들이 “족한 얼굴”로 와서 ‘고향’과 ‘그리운 사람’에게로 사연을 보낸답니다. 공감과 동일시의 발견이지요. 사람들은 누구나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그립고, 아쉽고, 다정하고, 슬픈 마음이 엉겨 “한방울 연연한 양귀비꽃”이 됩니다. 애틋하고 슬픈 사랑의 절정입니다.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 고통스러운 것보다, 사랑하지만 이룰 수 없는 것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고 반복강조하듯이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데 있으며,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오늘도 너에게 편지를 쓰고,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너를 사랑했기에 행복했다’고 단언합니다.

    

사랑은 적극적으로 줄 때 행복하며 소극적으로 받으려고만 할 때 불만스럽고 갈증을 느낍니다. 현대 문명 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사랑의 결핍을 호소합니다. 현대는 자유와 평등 속에서 자기 위주의 삶이 증대되었고, 사랑도 주는 것보다 사랑받기 위해 안달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랑은 주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의 결핍이 올 것입니다. 이 시에서는 그런 왜곡된 현대의 사랑에 대하여 경종을 울립니다. 진짜 사랑은 받으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는데 있으며, 그때 진정한 행복이 깃든다는 것입니다.

    

현대는 문명화되면서 지나친 자기중심주의로 혼자 사는 것을 편하게 여기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나의 삶을 침해하거나 방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 하지요. 그것이 이혼과 홀로 가정의 급증, 별거와 졸혼의 급증을 가져온 거라 여깁니다. 함께 사는 사람도 각각 생활하며 따로 잠을 자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사랑은 침실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듯이 나이가 들어도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내가 아는 어떤 이는 부인과 각방을 쓴지 오래라고 합니다. 서로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라는데 함께 오래 살다 보면 잠버릇도 동화되는 것 아닌가요. 나이 들어 혹시 자다가 위기라도 닥치면 죽음으로 아침을 맞이할지 모릅니다. 사랑은 함께 생활하고, 함께 자고, 함께 차려 먹는 동행의 선물이 아닐까요.

    

날이 갈수록 노인 문제는 심각합니다. 특히 치매 노인이 증가합니다. 통계청의 ‘장래인구특별추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치매 환자가 2020년에는 99만7,000명(12.3%), 2030년에는 163만 3,000명(12.6%), 2040년에는 252만 7,000명(14.7%), 2050년에는 351만 1,000명(18.5%) 2067년에는 392만 1,000명에 이를 것이라 합니다. 2067년 치매 환자 390만 명의 추정치는 65세 이상 고령 인구의 21.5%이며 전체 인구의 9.4%에 해당합니다. WTO(세계보건기구)에선 30년 후 세계는 1억 5000만 명의 치매 환자가 발생할 거랍니다. 이제 치매는 범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공약으로 ‘치매 국가책임제’를 도입하겠다고 하여 ‘치매안심센터’ 확충, 치매 ‘인지기능 검사’ 시행, 치료비 및 요양비 부담 완화, 장기요양서비스 확대 등을 시행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양과 보호, 요양비 부담 완화 등으로 치매를 극복하는 사회가 될 수 있을까요. 절대 아닐 것입니다.

    

이제 치매는 노인의 문제가 아니라 젊은이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치매 노인을 직․간접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젊은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잃은 현대사회에서 젊은이들에게도 스트레스와 고독 등에 의한 치매 못지않은 병이 많습니다. 그래서 각종 사회문제를 일으킵니다. 저는 이 문제의 저변에 우리 사회의 사랑 결핍을 꼽고 싶습니다.

    

치매를 포함한 많은 정신병이 무료함과 자아존중감의 상실에서 온답니다. 치매 인구가 늘어나는 것은 노령 인구의 증가와 영양과 질병의 문제도 있지만, 현대인의 무료함과 자아 상실에서 오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여성의 치매율이 높답니다. 지금의 노인들은 치열한 산업화과정을 겪으며 살았습니다. 특히 여자들은 남편 뒷바라지와 자녀 양육 등으로 홀로 무료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입니다. 남자들이 대부분 나이 들어서도 밖으로 돌기 때문이지요. 아직 우리나라의 노인들은 아내를 보듬어 주는데 약합니다. 가족 특히 배우자와 사랑을 주고받고, 즐길 수 있다면 치매는 어느 정도 예방하고 극복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사랑은 무료함을 달래고 자아를 강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끝없이 주고받는 사랑은 자신과 타인을 인정하게 하고, 강한 공감과 지지를 끌어내며, 애착 관계를 회복하여 박탈감을 치유하고 좌절을 이기는 능력을 기릅니다. 그런 사랑은 “나”의 가치관으로 “너”를 예단하지 않으며, “나”와 “너” 사이에 맑은 샘물이 흐르듯, 동류의 가치관을 형성합니다. 삶의 역동성은 자기중심적이고 예민하며, 받고 얻으려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인 예민함에는 경계와 방어기제와 배척이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의 감정까지 상하게 하는 바이러스이지요. 진짜 사랑은 상대에게 줌으로써 ‘내 안에 너’를 안고 ‘네 안에 나’를 담글 수 있는 감정이입에 있으며, 사랑은 역경을 이겨내게 하는 힘입니다. 사랑은 아름다운 ‘감정의 전염 바이러스’입니다.

    

사랑에도 위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의지의 힘입니다. 그대를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지가 사랑을 위기에서 구합니다. 그래서 의지는 사랑의 온돌이 식지 않게 지속하여 군불을 지피게 합니다. 그것이 최대식 할아버지처럼 사랑의 힘이며 사랑과 의지의 교집합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의 위기가 닥치면 대체로 다음 네 가지의 행동을 취합니다. 첫째, 배반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폭언이나 지독한 원망과 증오를 유발합니다. 그래서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도 합니다. 둘째, 모든 것을 ‘내 잘못’이라고 여기며 골방에 처박혀 고민하며 웁니다. 그것은 상사병과 우울증을 났습니다. 셋째, 친구 혹은 친지에게 하소연하면서 자기는 결코 배신당한 것이 아니라고 자존심을 드러내며 태연한 척합니다. 그리고 홀로는 깊은 속앓이를 하지요. 넷째, 상대방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지 않나 감시하듯 살핍니다. 아니면 무작정 다른 사랑을 찾아 나서지요. 그것은 사랑의 반동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유치환의 [행복]에서처럼 사랑했기에 행복하며, 사랑한 사람이기에 행복을 빌어주는 ‘승화’의 반응을 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승화’의 반응은 쉽지 않습니다.

    

영화 [타이타닉 Titanic, 1997년]이 생각납니다. 로즈 드윗 부카터(청년: 케이트 윈즐릿, 노년: 글로리아 스튜어트) 는 어머니의 강압으로 자존심 강하고 돈 많은 커리돈 “칼” 하클리(빌리 제인)와 원치 않는 약혼 후 일등석 승객으로 승선했지만, 자살을 시도하다가 운 좋게 3등석에 승선한 무일푼의 화가 잭 도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만나 사랑에 빠지지요. ‘잭’은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 끝까지 ‘로즈’를 지켜줍니다. 하지만 ‘칼’은 자기만 살기 위해 비겁한 행동까지 합니다. ‘로즈’는 끊임없이 ‘잭’을 불렀지만, ‘잭’은 ‘로즈’를 지키면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잭’의 표정은 행복했습니다. ‘로즈’는 ‘잭’의 사랑으로 생명을 구했습니다.

    

산업 문명은 핵가족화를 가속 시켰고, 소중한 가족연대의식을 파괴해 왔습니다. 나는 이것을 문명의 과도기적 병폐라고 하고 싶습니다만, 이제 병들면 시간과 공간적 제약 때문에 가정에서의 케어는 불가능하며, 너나 할 것 없이 병원, 요양원 등으로 갑니다. 그런데 가족들은 처음에는 자주 찾아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발길이 뜸해집니다. 어머니가 8개월 정도 병원에 계신 적이 있었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저녁으로 오는 아들, 며느리, 손자들을 보며 주변 사람들이 매우 부러워했답니다. 어떤 이는 한 달 동안 가족이 보이지 않았고 어떤 이는 입원비와 간호 때문에 자녀들이 다투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어쨌든 현대인은 병원에서건, 요양원에서건, 가정에서건 대다수가 홀로 죽습니다. 오복(五福) 중의 하나가 고종명(考終命)이라지만, 가족 앞에서 유언을 남기고 아쉬움의 손을 잡으며 숨을 거두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책 『당신이 있어서 정말 좋았어』(오기타 치에 지음, 한성례 옮김, 책이 좋은 사람 출판)가 생각나서 다시 봅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당신이 이렇게 훌쩍 가버릴 줄 알았다면, 진작에 말해주는 건데, 내가 너무 늦었구려. 여보... 늘 고마웠소...고생만 시키다 보냈구려. 더 사랑해주지 못해서 미안하오. 당신이 있어서.. 정말 좋았소.” 그는 오늘도 불단의 부인 사진 앞에 향을 피웁니다. 그리고 사진 속 부인을 그윽하게 바라봅니다. ‘당신이 있어서 좋았어.’> 사랑도, 사랑한다는 말도, 함께 즐기는 일도, 그대 떠나기 전에 해야 합니다. 그래야 떠나는 자도 남는 자도 빛을 발할 것입니다. 사랑했기에 그대가 있었기에 행복합니다. 간호사로 평생을 임종을 지켜보던 저자 <오기타 치에>는 이 책에서 후회 없이 사랑할 것,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이름은 가족이라는 것, 죽음도 삶의 한순간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91세의 최대식 할아버지의 치매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마음을 읽으며 치매 노인이 증가하는 세상에서 모든 가족과 노년에게 유치환의 [행복]처럼 끊임없이 주는 사랑이 깃든다면 치매도 예방하고 극복할 수 있으며, 진정 행복할 거라 여겨봅니다. 사랑은 노인성 치매뿐 아니라 현대 문명병을 치유할 수 있는 명약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사랑 공부를 더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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