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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기구한 운명 속에 지역 브랜드로 거듭난 《향수》

이상호 | 입력 : 2019/07/08 [09:56]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공동대표] 작년 이맘때 동호인들과 [옥천 향수 100리 길]을 자전거로 완주했습니다. 길목에는 정지용 생가, 육영수 생가, 조헌 신도비 등도 있었습니다. 향수 100리 길에 들어서기까지는 차도를 따라가다 보니 위험하고 힘들었지만, 굽이치는 금강 변을 따라 달릴 때는 시원한 바람과 아름다운 풍경이 시심(詩心)을 자극했습니다. 금강 휴게소에서 매운탕으로 점심을 먹고 다시 옥천역으로 와서 열차로 귀환했습니다. 주목적이 자전거라이딩이었기에 주변 유적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특히 정지용 생가를 보지 못한 것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정지용 생가는 몇 번 가보았지만 갈 때마다 느낌이 새로웠습니다. 갈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은 정지용에 대한 이해와 느낌의 변화이기도 합니다. 올해 작심하고 다시 찾았습니다. 모습은 그대로지만 정지용의 시 《향수》는 해마다 다시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향수

   -정지용(1902∼1950)-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던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를 반복적으로 읊는 데서 당시 고향을 떠나 떠도는 자의 그리움이 절절히 솟아납니다. 이 시는 당시 고향(농촌)의 풍경이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풍경화를 감상하듯 시를 감상해 봅니다.

    

정지용에게는 어릴 적 뛰놀던 고향 주변이 넓은 벌판이었겠지요. 소년에겐 동쪽 끝으로 흐르는 실개천이 옛이야기를 지줄 대는 이야기꾼이요 벗이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얼룩백이(다양한 해석, 칡소로 보는 견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니 너무나 평화롭고 한가합니다. 소년은 자연과 어울리며 사색하고 시심을 키웠을 것입니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가는 깊어가는 겨울밤입니다. 곡식을 거두었기에 비인 밭이겠지요. 차가운 겨울바람이 세차게 지나가니 말발굽 소리처럼 들립니다. 옛날에는 겨울밤 방안공기가 차기 때문에 저녁밥을 짓고 난 불붙은 숯덩이를 담은 질화로 하나쯤은 방안에 두었지요. 불 주걱으로 불을 지펴가면서 가족끼리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었고, 고구마 등을 먹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질화로를 안고 살다시피 했고,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질화로의 불기운에 언 손을 달래기도 했습니다. 거기 소년도 함께 있습니다. 곁에는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높이 고여 베고 누워 살포시 잠이 들었습니다. 단란한 가정입니다. 사실 나의 어린 시절도 그랬습니다. 아버지는 공부하는 어린 내 곁에 누워 회심곡이나 춘향전, 심청전을 읽다가 살포시 잠이 드시기도 했지요. 그래서 이 대목을 읽으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저며옵니다.

    

옛날 사람들은 대부분 흙에서 자랐습니다. 그때는 농경사회였기에 흙이 삶의 주 터전이었지요. 나의 어릴 적 고향에 대한 추억도 역시 흙입니다. 시인의 몸과 마음이 흙에서 자랐습니다. 흙이 있는 농촌은 들판, 언덕, 풀 섶 등이 모두 놀이터입니다. 그때의 파아란 하늘빛이 너무도 그립습니다. 저녁에 마당 평상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면 별이 내게로 쏟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나도 상상의 날개를 무수히 펼쳤지요. 시인의 밤도 그랬을 것입니다. 대나무로 만든 활과 화살을 가지고 활쏘기 놀이를 했습니다. 파란 하늘을 향해 화살을 날렸는데 화살은 저쪽 언덕 풀 섶에 내려꽂혔습니다. 소년은 화살을 찾으려 이슬 맺혀 함추름(함초롬-젖거나 서려 있는 모습이 가지런한 모습)한 풀 섶을 헤집습니다. 그 순수하고 동심 어린 유년의 추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누이는 언제나 귀엽고 아름답습니다. 어린 누이가 검은 귀밑머리를 날리며 나풀나풀 뛰어가는 모습은 전설 바다에서 춤추는 것 같이 신비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습니다.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밭에서 이삭을 줍고 가사를 돌보니 사철 발을 벗고 지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당시 여인의 모습을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때의 여인 특히 며느리는 가정에서 노동력의 한 축이었지요. 12살에 결혼한 시인에게 그 추억은 그리움으로 마음 한곳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서리까마귀와 성근 별을 보면 분명 늦은 가을밤입니다. 깊어가는 늦가을 밤, 성근 별(석근 별-드문드문 돋아난 별)이 알 수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있으니, 밤은 깊어 별들도 지고 있습니다. 그 밤은 동화처럼 아름다운 밤이며 별이 뜨고 흘러가는 밤하늘은 신비스럽고 아늑하기만 합니다. 그 하늘 아래서 서리까마귀가 우지 짖고 초라한 지붕 위를 지나갑니다. 집안에는 가족들이 흐릿한 불빛(호롱불)에 돌아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옛날 전형적인 시골 풍경입니다.

    

유년 시절에 겪은 이 모든 것들은 시인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은 추억이며 그리움입니다. 그것은 사실 우리가 산업화 이전에 겪은 것들입니다. 시인은 아름답고 서정적인 시어로 그 추억을 우리 가슴에 멋지게 살려냈습니다. 다만 시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언급되지 않은 것에 대해 많은 해석이 있습니다만, 나는 아주 당연한 그리움을 애써 표현하지 않고 숨겼을 것이라 여깁니다. 가장 강하고 당연한 그리움은 굳이 표현하지 않고, 다른 그리움 속에서 더 강한 은유로 살아 숨 쉬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객지를 떠돌다 보면 잘살든 못살든 향수는 강합니다. 특히 삶이 힘들고 지칠 때 그렇습니다. 일제 폭압 시절, 객지를 떠도는 자의 삶은 고달픕니다. 몸과 마음을 붙일 곳이 마땅하지 않고, 하루하루의 삶이 갈등과 외로움의 연속이기도 할 겁니다. 그럴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유년의 추억은 더욱 강렬합니다. 그래서 시에서 “그곳이 차마 잊힐 리야.”라고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가 일제 폭압 시절에 쓰였으니 《향수》에서 말하는 고향은 조국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조국의 산천에서 단란하게 살던 옛날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라 잃은 설움을 은유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시는 정지용의 초기작이자 대표작으로 불립니다. 그리고 이 시를 가사로 한 대중 가수 이동원과 테너 박인수가 부르는 노래 《향수》는 우리에게 친숙한 명곡이 되었습니다. 시 《향수》는 1927년 『조선지광朝鮮之光』 3월호(통권 56호)에 실렸고, 1935년에 낸 『정지용 시집』에도 수록된 것으로 전합니다. 지금은 옥천의 정지용 생가가 명소가 되어 많은 문인과 관광객이 찾고 있지만, 오랜 세월 정지용은 사회주의자이며 월북 작가로 분류되었기에 정지용의 삶과 《향수》는 한국 분단사와 더불어 기구한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정지용은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번지에서 아버지 정태국씨와 어머니 정미하 씨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정지용을 잉태했을 때 ‘연못에서 용이 승천하는 태몽을 꾸었다’ 해서 아명이 지룡(池龍)이었답니다. 아버지는 한의사였는데 1911년 대홍수로 집과 한약재, 가재도구가 모두 떠내려가는 바람에 어렵게 살게 되었답니다. 1913년 정지용은 12세에 동갑인 송재숙과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 처가에서 혼례를 올렸답니다. 1918년 17세에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고, 이듬해 12월에 『서광』 창간호에 그의 유일한 소설 [삼인]을 발표했답니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휘문 사태 주동자가 되어 이선근과 함께 무기정학을 받았으며, 두 학기 수업을 받지 못했답니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교비 장학생에 선발되어 일본 동지사(同志社)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습니다.

    

내가 가본 일본 동지사 대학은 설립 당시부터 독특했습니다. 설립자 니지마 조(新島襄)는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1864년 일본의 쇄국정책에 의한 출국 금지령에도 미국 보스턴으로 유학하여 신학대학에 입학하였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애머스트 칼리지에서 10년간을 공부하고 돌아와 개신교 교육을 목적으로 1875년에 동지사 대학을 설립했습니다. 그는 태평양전쟁에 대한 반전 운동으로 옥살이를 했던 반전 평화 운동가이기도 했답니다. 지한자(知韓者)라 윤동주, 정지용 등이 이 학교를 나왔고 그들의 시비(詩碑)가 있습니다. 정지용은 1929년에 동지사(同志社)대학을 졸업하고 약속대로 모교인 휘문고보 영어교사로 근무했습니다. 교사 시절에 늘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기에 먼발치서 보아도 정지용임을 알 수 있었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정지용은 1926년 『창조』지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를 발표해 등단했으며 구인회 창립회원이기도 합니다. 1930년 시인 박용철, 김영랑, 이하윤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습니다. 1933년 <『카톨릭 청년』지에 이상의 시 《꽃나무》를 추천해 등단시켰으며, 1935년에는 『정지용 시집』(시문학사)을 냈습니다. 1939년 『문장』 지의 추천 위원으로 청록파 시인인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을 등단시켰습니다. 한때 좌익 문학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해 아동문학분과위원장이 되었으나 문학 활동을 하지 않았고, 뜻이 맞지 않아 그만두었답니다. 1942년 태평양전쟁 이후부터는 글을 쓰지 않았으며, 광복 후에는 휘문고교 교사를 그만두고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하였고, 다시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정지용은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머물렀답니다. 그는 설정식 등 젊은 좌익 제자들에 의해 모시고의적삼 차림으로 북한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되었답니다. 그 이후 그의 생애에 대해선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북으로 끌려가 평양 감옥에 수감 되었다는 설, 고문을 당하다 죽었다는 설, 북으로 끌려가다 동두천 소요산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다(북한 시인 박산웅의 말이라 전하)는 설 등 다양하지만 무엇 하나 확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분명한 것은 정지용이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고, 잠시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고, 좌익문학단체 활동을 한 것과 나중에 좌익문학단체와의 인연을 끊은 것 외에는 스스로 월북하였거나 북한을 찬양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는 군사정권에 의해 사회주의자요 월북 시인으로 분류되어 그의 시와 가족들이 겪은 수난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고통 속에서 살았던 부인 송재숙 씨는 70세를 일기로 1971년 4월 15일 별세했답니다. 그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들도 곳곳에 흩어져 살았으며 장남 구관씨는 보따리 장사 등으로 전국을 떠돌며 이름조차 제대로 내세우지 못하는 험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1988년 정부에서 재검토한 결과 정지용은 월북한 것이 아님이 확인되어 해금되었고 정지용의 시를 내놓고 낭송하게 되었지만,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박힌 앙금은 오래 갔습니다. 분단이 준 시대의 아픔이며 분단을 정치에 이용한 정권의 폐해입니다. 이처럼 한 위대한 문인의 삶과 작품은 시대의 질곡과 이념의 대립 그리고 정치적 편견으로 기구한 운명을 지녔습니다.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과 후손이 겪은 아픔 또한 말할 수 없습니다.

    

해금과 더불어 《향수》는 대중 가수 이동원과 테너 박인수가 노래로 불러 대중의 가슴속에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가수 이동원이 시 《향수》가 너무 좋아 노래로 부르고 싶어 당시 최고 작곡가 김희갑(배우 김희갑이 아님) 선생을 찾아갔지만, 김희갑 선생은 ‘시가 노래의 운율에 맞지 않아 곡을 붙일 수 없다’면서 돌려보냈답니다. 그러나 이동원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간청하였고, 김희갑은 힘들게 작곡을 했답니다. 이동원은 테너 박인수에게 불쑥 《향수》를 같이 부르자고 했고 박인수는 가사가 마음에 들어 함께 부르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박인수는 대중 가수와 같이 노래를 불러 클래식을 모독했다는 죄명으로 국립오페라단에서 제명당하는 수모를 겪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당시의 사회적 편견이었지요.

    

이제 정지용과 그의 시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정지용이 1944년부터 3년 동안 은거했다고 전하는 경기도 부천시 소사읍 소사 본 2동 89-14번지가 정지용이 살던 집터로 밝혀졌습니다. 이것은 구자룡이 부천천주교사 자료를 수집하던 중에 밝혀지게 되었는데, 그때 정지용은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시는 쓰지 않고 소사성당 창립과 기도문 번역 등 신앙생활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천과 정지용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답니다. 부천 복사골문학회는 1993년에 정지용이 살았던 집터에 기념 표석을 세웠고, 부천시는 부천중앙공원에 《향수》 시비를 세웠습니다.

    

정지용과 《향수》는 그의 고향 옥천에서 거듭 탄생하고 있습니다. 2005년 개관한 정지용 문학관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으며, 문학관 들어서자 노래 《향수》가 울려 퍼집니다. 뜰 앞 벤치에는 정지용 밀랍인형이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이하며, 방문객들은 정지용과 나란히 앉아 사진을 찍습니다. 옥천군은 해마다 정지용의 생일인 음력 5월 15일을 전후해서 정지용 생가에서 [지용제]를 지냅니다. [지용제]는 이제 32살을 넘겼고 충청북도가 선정한 최우수 문학축제가 되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정지용의 시 《향수》는 옥천군을 대표하는 대표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옥천군은 옥천군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뿐 아니라 지역명, 축제 등에도 《향수》를 붙입니다. 이를테면, 옥천군 성왕로 1262번지에는 ‘향수 마을 아파트’가 있고, ‘향수 100리길’ 뿐만 아니라 ‘향수 30리길’ ‘향수 바람길’ ‘향수 공원’ 등이 있습니다. 옥천지역신문인 ‘향수 신문’이 있고, ‘향수 시네마’도 있으며, ‘향수 복숭아 축제’ ‘향수 포도 축제’ ‘옥천 향수 한우타운’ ‘옥천 향수 식품’ ‘옥천 향수농원’ ‘옥천 향수 김치’ ‘옥천 향수주유소’ ‘옥천 향수펜션’ ‘옥천 향수배 풋살대회’ ‘옥천 향수 딸기’ 등 향수를 붙이지 않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옥천에서 《향수》는 계속 다양한 영역에서 지역 브랜드로 거듭나는 ‘옥천의 혼’이 되고 있습니다. 옥천은 정지용이란 위대한 시인을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기구한 운명 속에 지역 브랜드로 거듭나는 정지용의 《향수》를 읽으며 분단과 편협된 정치 권력에 의해 압제 된 문인과 그의 작품, 그의 가족이 겪은 아픔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정치적 편견으로도 무지하게 예술을 함부로 예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시인 정지용에 대한 외경심을 가집니다. 지방 곳곳에서 숨은 문인을 살려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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