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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타향살이의 설움을 달래주던 《고향》

이상호 | 입력 : 2019/07/17 [17:09]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천안아산경실련공동대표=이상호] 퇴직을 앞두고 공을 들여 ‘텃밭 가꾸기’의 터전을 마련하였습니다. 크지는 않지만 소일하기는 조금 벅찬 밭을 일구느라 여름이면 늘 땀을 흘립니다.

 

어제는 아내와 텃밭에 풀을 뽑고 오이와 가지, 토마토 등을 수확하다가 땀에 범벅이 된 몸을 평상에 앉혔습니다. 잘 자란 작물들을 바라보면서 문득 어릴 적 고향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지만, 고향이 그리워져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어릴 적 여름날 고향마당 한쪽엔 늘 고추와 가지, 오이가 심겨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여름 점심의 주요한 반찬이었지요. 고추장에 그것들이면 찬밥 한 그릇은 뚝딱 해치울 수 있었습니다. 내가 오이를 좋아했기에 어머니는 내게 오이 냉채를 참 많이 해 주셨지요. 그래서인지 난 올해도 오이를 유독 많이 심었습니다. 오이는 늘 어릴 적 어머니의 오이 냉채를 떠올리게 합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어머니와 고향 생각이 짠하여 전에 읽었던 백석(白石 1912~ ?) 시 《고향》을 읽으며 상상 속에서 아버지, 어머니, 이웃집 아저씨를 떠올렸습니다.

    

고향

 

 

- 백석(白石 1912~ ?) -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누워서

어느 아츰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씨(氏)를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삼천리 문학' 2호, 1938.4)

    

백석(白石 1912 - ? )의 본명은 백기행(白蘷行),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오산학교를 나왔습니다. 후에 동경의 아오야마 학원을 졸업했고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여성』을 편집했습니다. 1936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해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했습니다. 그의 시는 고향인 정주 지방의 사투리와 토속적인 소재들을 제재와 시어로 많이 사용했으며, 고향의 모습을 통해 잃어버린 나라와 민족의 모습, 정 많고 살기 좋았던 파괴되지 않은 농촌 공동체의 정서와 특유의 동화적 세계관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의 시가 교과서에도 실리고 수능에도 인용되지만, 과거에는 읽히지 못했지요. 그가 북한으로 간 영문은 잘 모르지만, 해방 이후 북한에서 문학 활동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정지용과 같이 해금(解禁)된 시인(詩人)입니다. 다행입니다.

    

지금 세대들도 그렇겠지만 5060 세대와 그 이전의 세대들에게 객지 생활은 힘들고 외로운 삶의 한 여정이었습니다. 객지에서 몸이라도 아프면 서러움의 눈물을 흘려야 했고, 부모님과 고향 생각이 절로 났지요. 위의 시는 1938년 4월 [삼천리 문학 2호]에 실린 것으로 전합니다. 1938년은 일제의 수탈과 유린으로 정말 형편없던 시기였지요. 삶은 처절했을 것입니다. 위의 시는 당시의 처절한 삶 속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상상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잘 풀어냈습니다. 시에서 백석의 고향이 정주와 함경도는 멀다면 멀지만, 그리 먼 거리도 아닌 것 같습니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은 자주 왕래하였던 모양입니다.

    

위의 시는 연의 구분이 없는 17행의 단연시 구조입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4개의 연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1, 2행에서 시인은 객지를 떠돌다가 북관(지금의 함경도)의 한 집에서 혼자 지내고 있는데 병이 나서 앓아누웠습니다. 그 병명을 말하지 않았기에 감기몸살인지 무슨 병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옛날에는 객지에서 심하게 앓아누우면 달리 방도가 없었지요. 인심 좋은 주인댁이라면, 안타까워 미음이라도 쑤어주고 의원이라도 불러주었을 것입니다만, 그렇지 못하면 꼼짝없이 몇 날을 홀로 앓아야 했지요. 시인도 매우 아팠던 모양입니다. 아픈 몸을 의원에게 보였으니, 주인댁이 불러주었는지 스스로 누구를 시켜서 불렀는지 의원이 왕진을 온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환자가 의원을 찾아가는 일도 있었지만, 의원이 왕진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기에 그것도 그때의 한 풍속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시인은 ‘앓아누움’으로 더욱 강한 향수를 느낍니다. 객지에서 병을 얻었으니 고향과 부모님이 얼마나 그립고 서러웠겠습니까.

    

3, 4행에서 환자인 시인이 처음 대면한 의원의 풍모와 인상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였느니 참으로 자비로운 상이고 관우와 같은 수염을 드리웠느니 여유 있고 푸근합니다. 그러니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같이 보일 수밖에요. 하여튼 시인은 자비롭고 푸근한 의원에게 아픈 몸을 보여 주고 있으니, 심리적으로 안심이 되는 모양입니다. 요즈음도 병원에 갔을 때 의사의 후덕한 인상과 자상한 말 한마디가 환자에게 매우 큰 위안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5행부터 15행까지는 의원이 환자인 나를 진맥하고 있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고향이 어데냐 한다.’에서 일반적인 진료와는 차원이 다른 진료 상황을 보입니다. 옛날 의원들은 새끼손톱을 길게 기르는 경우가 많았지요. 새끼손가락과 새끼손톱은 탕약 온도를 측정하고, 귀와 코도 후비는 다용도입니다. 그 모습은 노동과는 거리가 있지요. 의원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어디가 아픈가?’ 등 병세를 묻는 게 아니라 ‘문득 고향이 어디냐’고 묻습니다. 환자는 즉시 ‘평안도 정주’라고 대답합니다. 의원이 ‘아무개씨 고향’이라고 다시 말하니 환자도 ‘그 아무개씨를 아느냐’고 묻습니다. 의원이 방긋이 웃음을 띠면서 ‘막역지간’이라고 하면서 수염을 쓰다듬습니다. 이어서 환자가 ‘아버지로 섬기는 분’이라 하니 의원이 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진맥을 봅니다. 진료 온 의원이 병에 관한 질문은 하나도 하지 않고 고향 이야기만 한 것입니다. ‘고향’이란 매개가 의원과 시인을 이어주는 강한 인연의 끈이 된 것이지요. 여래 같은 상, 관공(關公)의 수염, 의원의 방긋한 웃음, 고향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지는 의원의 손길은 의원과 환자를 심리적으로 이어주는 강한 감정이입의 한 장면입니다.

    

이 시는 마지막 16행과 17행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환자인 자신의 손을 잡고 진맥하는 의원의 손길이 너무나 따스하고 부드럽습니다. 환자는 진맥하는 의원에게 몸을 맡겨 눈을 지그시 감고 《고향》으로 상상의 날개를 펼쳤을 것입니다. 의원의 손길에서 고향과 아버지의 숨결과 아버지 친구의 따스함도 느꼈을 것입니다. 환자는 마음이 편안해져 객지의 서러움이나 향수병 따위는 치유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또 의원의 손길로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 고향과 이웃, 친척, 친지 등 강한 자연공동체에 대한 유년의 추억을 강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의원의 손길은 시인에게 병의 치유만 아니라 고향을 원형 그대로 가져다준 것이지요.

    

때로는 우연한 계기에 어린 날의 추억을 더듬고 마음의 위안을 얻기도 합니다. 시에서 의원의 역할은 매우 의미가 큽니다. 의원의 진맥으로 병명을 밝혔거나 처방을 준 것은 없습니다. 시인에게 의원은 망향의 슬픔을 달래주는 ‘위로의 언어’이며, 갑갑하고 닫힌 현실의 벽을 허무는 ‘마음의 창’이라 봅니다. 의원의 자비로운 모습, 고향에 대한 따뜻한 말, 따듯한 손길 등은 환자에게 고향의 실체를 발견하게 하고 위안을 주었습니다. 따라서 의원은 환자를 고치는 의사의 기능보다는 환자를 고향으로 데려다주는 안내자요 향수병을 치유해 주는 묵시적인 상담자의 기능을 수행한 것이라 여깁니다.

    

이 시가 발표되던 시기인 1930년대를 전후하여 적어도 70년대 후반까지는 고향을 제재로 한 시와 노래가 엄청나게 발표된 것으로 압니다. 당시는 그만큼 살기가 힘들고 고향을 떠나 객지를 떠돈 사람들이 많았으며, 객지의 삶은 늘 외롭고 척박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특히 1930년대 이후부터의 일제의 수탈이 더욱 심했으니 그 상황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쩌다 찾아간 고향은 일제의 수탈로 정든 사람들은 떠나고 옛 모습도 점차 사라져 가고 있었겠지요. 그래서 고향을 잃은 회한을 시와 노래로 많이 달랬던 것이지요. 이 시에서도 수탈로 인해 정든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고 점차 피폐 되어가는 고향의 정서를 원형 그대로 그려 봄으로써 망국의 한을 달랜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린 해방 이후 급속한 경제발전과 문명화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래서 요즈음 신세대들에게 이 시는 그리 감동적이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작품은 시대성을 품고 있다’는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오늘의 문명적 의식으론 시《고향》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향’이란 자연공동체는 해체되어가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사라져 가는 것 같습니다. 동시에 ‘향수’는 옛사람들만의 정서가 되는 것 같습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휴가철이 되면 피서지보다는 고향의 부모님을 찾아뵙고 농사일을 도우며 함께 했지요. 이제 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명절이면 고향을 찾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반대로 부모님이 서울 등 도시로 자식의 집을 향해 가지요. 어떤 집들은 아예 외국이나 휴양지로 떠납니다. 고향을 찾아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고 성묘를 하며 혈육의 정을 나누는 모습은 점차 사라져 갑니다. 이제 어른들의 가슴에도 “고향”이나 “향수”는 추억의 책갈피에 끼워진 나뭇잎이며, 신세대에겐 낯선 낱말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고향》이란 자연공동체를 해체한 가장 큰 힘은 문명입니다. 문명은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 되었고,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났지요. 그야말로 이농향도(離農向都)가 가속화되면서 농촌은 젊은 사람 기근 현상과 노인 인구의 증가로 해체의 위기에 처해 있지요. 통계청의 통계에 의하면, 농가 인구는 2014년 275만 1792명, 2015년 256만 9387명, 2016년 242만 2256명, 2018년 231만 4982명으로 매년 줄어들고 있습니다. 2018년 전체 농가 인구 중 65세 이상은 103만 4718명으로 고령화율 44.7%를 기록하여 2014년 39.1% 2015년 38.4% 2016년 40.3%, 2017년 42.5%보다 매년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제 농촌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농촌의 해체와 더불어 정서적인 ‘고향’과 ‘향수’도 해체되어가고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면 성격 형성과 삶의 기초를 다진 유년의 추억은 늘 무의식의 깊은 심연에 있는 호수입니다. 그 호수의 물은 어떤 계기를 만나면 의식과 함께 강이 되어 흐르지요. 그러나 고향과 향수는 혈연, 지연 등 자연공동체에 의한 애착과 연결되어야 강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도시에서 수시로 이사 다니며 학교를 다닌 요즈음 세대들에게 고향과 향수는 가슴 깊이 새겨진 유년의 추억이 되지 못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문명은 자연공동체의 해체를 가속화 시켜왔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페르디난트 퇴니에스(Ferdinand Tönnies)가 주장한 것처럼, 사람들은 문명의 발달에 힘입어 가족·친족·민족·마을 같은 혈연과 지연 등 애정에 기초한 공동사회(Gemeinschaft 게마인샤프트)를 떠나, 회사·도시·국가·조합·정당 등과 같이 계약과 협약 등 인위적이고 타산적인 이해관계로 얽힌 이익사회(Gesellschaft 게젤샤프트)로 자유 선택의지에 의해 편입되어 갔지요. 그 결과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 도시 문명은 발달해 갔지만, 농촌의 해체 현상과 전통적 애정 가치의 파괴는 또 다른 인간과 사회문제로 등장했습니다. 이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지요. 바람직한 사회는 인정가치와 이익 가치가 균형을 이루고 공존하면서 보완될 수 있는 사회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농업의 공익적 가치 살리기와 농촌 살리기, 고향 살리기 정책을 쓰고 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향은 단순한 자연공동체(自然共同體)의 회복이 아니라 치유공간으로서의 자연공동체의 회복이란 측면에서 의의가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는 고향을 떠나 20년을 떠돌며 오로지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고향엔 유년의 추억과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사랑하는 아내 페넬로페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결국, 포세이돈의 온갖 방해와 폭풍우를 헤치고 트로이의 목마를 타고 잠입에 성공한 후 귀환하여 사랑하는 아내 페넬로페와 재회하고 해로합니다. 고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과 추억이 깃든 치유공간이며 안식처입니다. 그런 고향이 문명화의 과정에서 해체되어간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진보된 문명화 정책으로 고향이 살릴 수 있길 바라며 백석의 시《고향》을 다시 읽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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