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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까치네 학교》, 그 많던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상호 | 입력 : 2019/08/14 [08:46]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도 농촌학교는 아이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운동장엔 까맣게 얼굴 그을린 아이들이 나름대로 만든 공을 가지고 축구를 하였고, 큰 키에 가지 길게 늘어뜨린 플라타너스 아래는 삼삼오오 공기놀이며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숲으로 우거진 운동장 한쪽 임간교실(林間敎室)에서 더위를 식히며 공부를 하던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파란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기러기처럼 아름답고 신비했습니다. 그래서 농촌학교 아이들에겐 학교가 피서지였지요. 어른들에겐 학교가 마음의 고향이라 명절이 되면 모두가 그곳에 모여 운동회를 했지요. 적어도 90년대 초반까지의 농촌학교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곳엔 까치들의 울음소리와 매미의 슬픈 사연만 남아 있습니다.

    

까치네 학교

  -김자연(1960~   )-

    

아무도 넘겨다보지 않는 돌담 지나

아무도 건너지 않는 징검다리 건너

하얀 이름표 달고

까치가 학교에 갑니다.

늦어도 기합 주는 선생님 없고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도 없는

학교에 갑니다.

바람 버스를 타고. 씨이잉-

미루나무가

수위 아저씨처럼 서 있는 학교.

그런데 아이들은 다 어디 갔을까.

반기던 그 아이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깨진 창문으로 나뭇잎 소리만 들락거리고

책상들이 조용조용 앉아 있는

햇빛만 지키고 있는 학교.

까치 혼자서 다니는 학교.

푸드득- 달리기를 해보고

농구골대에 앉아 심판도 보지만

아이들이 없는 운동장은

토옹 재미가 없다.

 

-김자연, 『감기 걸린 하늘』(시읽는 어린이 31)에서-

    

김자연(1960~ )의 동시 《까치네 학교》는 의인화된 까치를 통해 아이들이 사라진 황량한 농촌학교의 모습을 그려냈습니다. 옛날 우리는 엄마가 만들어준 하얀 이름표와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돌담 지나 징검다리 건너 십리가 넘는 길을 걸어 학교에 갔습니다. 아이들은 희망에 부풀고 저마다의 소식으로 재잘거리며 산을 넘어 걸어서 학교에 갔습니다. 그래도 다리 아픈 줄 몰랐고 즐거웠습니다. 혹시 늦으면 무거운 백보(책을 싸서 등에 매고 다니던 보자기)를 두 손으로 치켜들고 벌을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농촌이라 부모님이 논밭 등 일터로 갈 때 새벽부터 아침 먹고 집에서 나온 아이들은 일찍 학교에 와서 재잘거리며 운동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 늦었다고 기합 주던 선생님도 없고,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도 없고 오직 미루나무만 수위처럼 서 있습니다. 이제는 아이들이 아니라 까치만 학교에 갑니다. 폐교된 지 한참 되는 학교에 아이들은 없고 깨진 창문으로 나뭇잎 소리만 들립니다. 교실엔 낡아빠진 책상만 있고 햇빛만이 학교를 지킵니다. 거기서 달리기도 해보고 농구 심판도 해보지만 토옹 재미가 없습니다. 함께할 아이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학교엔 아이들에 있어야 학교입니다. 아이들은 다 어디 갔을까요. 점점 해체되어가는 농촌의 현실을 담아낸 안타까움이 가득한 시입니다.

    

이 동시는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입니다. 동시에는 대부분 자연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배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아이들이 사랑스럽게 뛰어놀지 않는 학교의 모습을 그린 아픈 사회 현실을 반영했습니다. 시에 아픈 사회 현실을 반영하려 하다 보면 서정적 감동보다는 비판적인 기능으로 인해 뒤틀어지고 어려워집니다. 반면에 자연과 사람에 대한 정서를 표현하다 보면 표현의 기교에 빠져 내용이 없어 공허해질 때도 있습니다. 특히 동시들은 어른이 쓴 것이기에 때로는 아이들의 마음과 정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는 폐교된 농촌학교의 모습을 그림을 그리듯 생생하게 묘사하여 아픈 사회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아이들의 마음을 전하는 감동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없는 농촌은 공동체의 해체와 마음의 고향마저 사라지는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급속한 경제발전과 공업화의 길은 사람들이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떠나게 했습니다. 1980년대 이후 식량 생산 외에는 딱히 돈벌이가 안되는 농촌에서 도시에 나가 돈을 번다는 것은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농촌은 점차 아낙네들이 농사를 짓고 남자들은 도시로 공사판으로 가서 돈을 벌어왔습니다. 그러다가 아예 농촌의 가산(家産)을 정리하고 도시로 향했으며 젊은이들에겐 도시로 나가 사는 길이 성공의 길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이 농촌 해체 현상과 마음의 고향, 추억의 언덕이었던 농촌학교를 사라지게 하는데 한몫했습니다. 지금도 탈농촌은 가속화되고 농촌엔 아이 울음이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만 해도 농촌이 도시보다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1975년 농촌 학령기 아동(8세~13세)은 311만 8000명으로 도시의 219만 700명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그러나 급속한 도시화, 산업화의 물결에 농촌의 학령기 아동은 1985년에 191만 7000명, 1995년엔 82만 1000명으로 급격하게 줄어듭니다. 2010년 이후 농촌공동체 해체 현상을 걱정하여 귀농과 귀촌의 장려, 청년 농부의 육성 정책 등으로 다소 주춤하여 일부 농촌학교가 살아나는 것 같았지만, 2017년에는 1975년의 14%에 불과한 44만 6000명으로 감소의 길은 막을 수 없으며, 지금도 학령인구의 감소는 진행되고 있습니다. 농촌은 젊은이 없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지 오래입니다.

    

농촌 학령기 아동 감소는 농촌학교의 소규모화와 폐교 가속화로 이어졌습니다. 지금 농촌학교는 대부분 전교생 60명 이하이거나 폐교되었습니다. 교육부 통계에 의하면, 2018년 기준 전교생 60명 이하인 학교가 도시의 동 지역엔 93곳이지만, 농촌인 읍․ 면 지역엔 1312곳에 이릅니다. 전체 농촌학교 2647교의 49.6% 이상이 60명 이하입니다. 초등학교는 6학년까지 있으므로 한 학년당 10명도 안 되며, 중학교도 학년당 20명이 안 되는 학교가 반수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학령인구는 점차 줄어들어 2018년 농촌 초등학교 273곳이 입학생이 0명으로 머지않아 폐교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그렇게 농촌학교에 아이들은 점차 사라지고 《까치 학교》만 늘어나게 되겠지요.

    

한창 경제성장의 태동이 걸리기 시작했던 1970년대는 오지와 낙도에도 학교 세우기를 추진했습니다. 인구가 적은 곳은 분교장을 만들어 문맹률을 줄이려고 안간힘을 썼지요. 대학생들은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없는 지역에 학당을 세우고 봉사활동을 하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도 면 지역에 중학교가 없어 야학당(夜學堂)을 만들어 중학교에 못 간 아이들을 가르쳤지요. 그때의 배움의 열정과 가르치는 사명은 심훈의 『상록수』를 연상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것은 대학생들의 소중한 사회 기여이며 사명이었지요.

    

그러나 교육부는 농촌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학교운영의 경제성을 내세워 1982년부터 운영이 어려운 소규모 학교 통폐합 정책을 추진해 왔습니다. 그 정책은 1998년 IMF를 맞이하면서 더욱 강력해 졌습니다. IMF 극복에 명운을 걸었던 김대중 정부에서는 시․도교육청 평가를 만들어 소규모 학교 통폐합률에 상당한 점수 비중을 두어 시․도가 앞다투어 소규모 학교를 통폐합 하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2010년까지 강력히 추진되다가 농촌주민들의 반대와 농촌공동체 해체를 걱정하는 목소리와 함께 농촌학교의 가치가 재평가되었고, 소규모 학교 통폐합은 다소 주춤하고 있지만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현재 초등학교가 없는 면 지역은 31개, 중학교가 없는 면 지역은 427개나 됩니다.

    

IMF 시절인 1998년 나는 교육청에 근무하면서 소규모 학교 통폐합과 관련된 정책 일부를 담당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생긴 시․도교육청 평가에 교육부의 한 과장이 평가자로 와서 소규모 학교 지원과 통폐합 추진율 저조를 질타하면서 통폐합이야말로 아이들 학습권을 살리는 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문제로 나와 한참 설전이 벌어졌지요. 나는 학교가 사라지고 어린아이들이 도시로 통학을 하면 어른들은 자녀교육을 위해 점차 도시로 떠나갈 것이며 그렇게 되면 농어촌과 섬 지역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될 것이고, 그것은 농촌 공동화 현상과 공섬화(무인도) 현상을 가속화 할 것이며, 사람이 살지 않아 더욱 황폐화할 것이고, 나중에는 관리를 위해 더 많은 예산이 투입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무조건적인 소규모 학교 통폐합 정책은 ‘제로게임’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미움만 샀습니다.

    

1990년대 초에 일찌감치 폐교된 작은 섬의 초등학교 분교장을 나온 사람에게 학교시절의 추억을 들었습니다. 그가 학교에 다닐 때 전체 학생 13명이었는데 선생님은 3명이었답니다. 학습과 일과는 새벽에 학교 가서 모여 공부하고, 집에 가서 아침 먹고 돌아와 운동장에서 놀다가 9시부터 11시까지 공부하고, 점심 먹고 놀다가 2시경부터 다시 공부하고 그랬답니다. 더위가 한창인 여름에는 새벽에 학교에 가서 10시까지 공부하고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는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3시 이후부터 6시까지 공부하고 저녁 먹고 학교 가서 다시 놀고 공부했답니다. 학교는 그야말로 놀고 공부하는 모두가 함께 어울리는 공동의 성장공간이었답니다. 그래도 학습에 문제가 없었다네요. 그들은 모두 잘살아가고 있답니다. 그는 섬 학교의 폐교를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었습니다.

    

농촌 소규모 학교의 폐교와 교육문제로 인한 주민 이탈은 농촌학교 교육의 질과 만족도와도 직결됩니다. 소규모 학교에는 다양한 교사와 기자재가 배치되기 어렵고 결국 다양한 교육을 전문적으로 받을 기회가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농촌경제연구원의 ‘2017년 농어촌 주민 정주 만족도’ 보고서에 의하면, ‘학생들이 좋은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주민들의 학교교육만족도가 10점 만점에 도시의 6.8점에 비해 읍 지역은 5.9점, 면 지역은 5.5점으로 낮습니다. 또 ‘학생들이 정규교육과정 외에 필요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데 대해선 도시주민이 6.8점, 읍지역은 5.9점이지만 면 지역은 5.2점으로 읍면지역으로 갈수록 낮습니다. 이는 학원 등 사교육과 다양한 방과 후 프로그램의 불가능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실제로 농어촌은 강사가 부족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어렵지요. 그래서 한 학교당 방과 후 프로그램이 도시지역은 36.7개, 읍 지역은 21.5개, 면 지역은 13.7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숫자로만 가름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농촌학교의 교육의 질을 높이고 다양화할 수 있는 정책을 펴는 것이 폐교로 인한 재산관리와 농촌공동체의 해체에 따른 비용보다 적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강조한 인(仁)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배려하고 서로 돕는 삶의 연대의식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농촌 해체 현상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농업과 농촌은 먹거리 생산이라는 기능을 넘어서는 삶의 정서와 자연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농촌학교는 문화의 중심이며 마음의 고향이며 소중한 연대의식의 샘물입니다. 농촌학교가 지역사회에서 사라지는 것은 자연공동체와 연대의식의 사라짐이며, 학교를 중심으로 한 지역 활동과 문화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인간에게 소중한 공동체 정신인 인(仁)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30~40대 젊은 부부들에게 학교가 사라진 농촌에 귀농하라는 것은 황무지에 씨를 뿌리라는 꼴이 되지요.

    

교육은 내용과 규모도 중요하지만, 문화와 정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오늘날 기능주의와 효율성 만능시대에 살면서 소중한 인간 정서를 경제 논리로만 풀어가는 것은 뒷날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될지 모릅니다. 이제 국가적으로도 탈농촌의 방지와 농촌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농어촌 소규모 학교의 통폐합보다는 새롭게 살릴 수 있는 정책을 고민할 때입니다. 까치들만 다니는 학교가 늘어나면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도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농촌공동체가 살아나 연대의식으로서의 인(仁)이 풍만한 세상을 꿈꾸어 봅니다. 까치만 다니는 학교가 아니라 까치가 아이들을 반기는 학교를 꿈꾸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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