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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세상읽기] 언제 가야 《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이상호 | 입력 : 2024/07/16 [09:28]

▲ 이상호(전 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소소감리더십연구소 소장)   ©뉴스파고

 

한나절은 숲속에서

새 울음소리를 듣고

 

반나절은 바닷가에서

해조음 소리를 듣습니다

 

언제쯤 내 울음소리를

내가 듣게 되겠습니까?

 

-조오현(1932~2018) 《내 울음소리》-

 

자기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특히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자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그 울음소리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는가?

 

마하반야 바라밀다....

어둠이 밀려오는 산사, 스님의 염불 소리는 더욱 청량하게 울린다. 그것은 때로는 아름다운 노래로 들리기도 하고, 때로는 청량한 울음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럴 때는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소리가 마음을 흔들기도 한다. 스님의 그 울음소리 같은 청량한 염불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어떤 이는 그것을 염불하는 단순한 목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어떤 이에게는 심금을 울리는 구도의 소리로 들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내 목소리로 말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육성인 내 목소리를 귀담아 듣는 사람은 드물다. 특히 그 목소리의 의미를 되새기는 사람은 더 드물다. 그래서 자기 목소리조차 잘 모르는 사람도 많다. 어쩌면 나도 내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뿐 아니라 목에서 솟아나는 물리적인 내 목소리는 들어도 마음에서 솟아나오는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하물며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내 울음소리를 듣고 그 울음소리의 의미를 되새긴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는 그동안 슬픔과 분노의 울음소리를 내본 적은 있어도 내면에서 조용히 솟아오르는 울음소리는 내고 듣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울음소리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도 그런 울음소리를 들으려 노력하지도 않은 것 같다. 지금 조오현(1932~2018)의 시 《내 울음소리》를 읽으며 참된 내 울음소리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내 울음소리》의 세계를 그려본다.

 

시인 조오현은 승려 시인이었다. 오래전 설악산 신흥사 조실로 있으면서 수도를 하며 시를 쓰다가 입적하였다. 그의 시를 읽으면 만해 한용운 선생의 냄새가 풍긴다. 그의 시는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하여 끊임없는 구도에 목을 매는 듯한 느낌을 진하게 받는다. 그는 끊임없이 스스로 내면의 울음소리를 듣기 위해 치열한 구도의 길을 걸어간 구도자였다. 외부 지향적인 삶을 살면서 끝없는 자기소외 속에서 허덕이며 아등바등하는 현대인들은 그 내면의 울음소리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거나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현대인들일수록 《내 울음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위의 시 《내 울음소리》는 현대시조이다. 시 전체에서 3.4조의 시조 리듬감이 줄줄 흐른다. 그래서 현대 시에서 찾아보기 힘든 시조시라고 할 수 있다. 초장의 “한나절은 숲속에서” 중장의 “반나절은 바닷가에서” 그리고 종장의 “언제쯤”은 시조의 운율을 잘 갖추고 있다. 시조는 특히 우리 민족의 시적 정서와 잘 어울린다. 그래서 읽기 쉬우면서도 마치 노래처럼 들리기도 한다.

 

시의 초장에서 “한나절” 있던 “숲속”은 어디일까? 그것은 아마 시인이 구도하며 거처하던 설악산 신흥사의 한 암자였을 것이다. 거기서 한나절을 명상에 잠겼을 것이다. 그리고 중장의 “반나절”을 지내며 “해조음 소리”를 듣던 그 “바닷가”는 어디일까? 그곳은 아마 설악산에서 가까운 바닷가 즉 속초 근방의 동해바다일 것이다. 시인은 숲속과 바닷가를 오가며 멍하니 앉아 새 소리를 듣고 해조음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명상에 잠겼을 것이다. 아니 명상이 아니라 멍때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끊임없는 내면의 세계, 자기 내면을 향한 성찰의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사실 휴가 때 숲속에서나 바닷가에서 갖는 그 ‘멍때리기’의 시간은 매우 아늑하고 달콤한 시간일 때가 많다. 무상무념의 시간 그것은 어쩌면 신선의 경지인지도 모른다.

 

시인이 숲속과 바닷가를 오가며 새소리와 해조음 소리를 들으며 진정 듣고자 했던 울음소리는 다른 데 있었다. 여기서 시인이 진정 듣고자 했던 울음소리는 “내 울음소리”였다. 그것은 종장의 “언제쯤 내 울음소리를/내가 듣게 되겠습니까?”라는 질문형의 구절에 집약되어 있다. 이 종장은 시의 절정을 이룬다. 그것도 질문형으로 끝을 맺음으로 구도자의 참된 면목을 드러낸다. 만약 “지금쯤 내 울음소리를/ 내가 듣습니다.”라고 했다면 시는 삼천포로 빠졌을 것이다. 시인은 그토록 숲속과 바닷가를 오가며 수도를 했건만 아직 “내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래서 그 “내 울음소리”를 간절히 듣고 싶어 한다. 그것도 누구에겐가 갈구하는 목소리로 묻는다. 누구에게 묻는 것일까? 아마 부처님일 것이다.

 

여기서 우린 이 시의 주제어인 “내 울음소리”의 세계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내 울음소리”는 진정한 마음의 소리이면서도 ‘깨달음의 소리’다. 불자에게서 그 깨달음의 소리는 부처의 소리를 깨우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지식적인 앎의 영역을 넘어선 영혼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깨닫는 해탈의 경지다. 깨달음을 얻으면 기쁨이 넘쳐난다. 기쁨의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니 그 기쁨으로 울부짖지 않을 수 있는가? 그래서 그 ‘깨달음의 소리’는 ‘울음소리’가 된다. “내 울음소리”는 바로 그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저절로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울음소리다.

 

그런데 그런 ‘깨달음의 소리’인 “내 울음소리”를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구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소리를 듣는 일이며, 마음을 정화하고 해탈하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그러려면 우선 지혜와 덕의 세계를 향한 끊임없는 학습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특히 마음과 영혼이 맑아야 하고 마음과 영혼의 귀를 열어야 한다. 그 귀를 열고 절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참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진정한 깨달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만약 마음과 영혼이 맑지 못하면 영혼의 귀를 열 수 없으며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세상에 수많은 범부(凡夫)들은 죽는 순간까지 ‘내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마음과 영혼이 맑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과 영혼을 흐리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에 대한 집착 즉 물욕(物慾)을 포함한 일체의 욕망이다. 그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마음과 영혼은 늘 흐려있고 마음과 영혼의 귀는 열리지 않는다. 시인이 숲속으로 바닷가로 가서 새소리와 해조음 소리를 듣는 노력은 바로 마음과 영혼을 맑게 하므로 마음과 영혼의 귀를 열기 위한 구도적 노력이다.

 

루쉰은 1907년에 쓴 「마라시력설 摩羅詩力說」에서 바이런(Byron 1788~1824) 등 혁명적 낭만주의 시인들의 시의 미학을 평가하면서 그들을 [摩羅詩派]라 불렀다. 마라(摩羅)라는 말은 인도에서 온 말로 ‘악마’ 혹은 ‘사탄’을 일컫는다. 그 악마와 사탄은 물욕과 함께 내 마음안에 존재하며 나를 괴롭히고 자신을 키워간다. 그래서 그 악마와 사탄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욕망을 비워야 한다. 그것은 곧 공(空)의 세계를 향한 비움의 지난한 노력이다. 루쉰은 「마라시력설 摩羅詩力說」에서 시의 힘은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후세 사람들에게 남겨 놓은 인물 가운데 가장 힘 있는 것은 마음의 소리(心聲) 만한 것이 없다. 옛사람의 상상력은 자연의 오묘함에 닿아 있고, 삼라만상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을 마음으로 깨달아 그 말할 수 있는 바를 말하게 되면 시가(詩歌)가 된다.(홍석표 옮김, 루쉰『무덤』, 선학사 2003. 86~87)”

 

시(詩)와 삶에서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기의 내면으로부터 세계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확장하고 연결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위대한 일이다. 그 내면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한 생명은 영원히 빛나며 나와 세계가 화락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시가(詩歌)와 같은 삶이 된다. 그래서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은 참으로 소중하다.

 

내면의 소리, 깨달음의 경지인 “내 울음소리”를 듣는 것은 해탈을 통한 몸과 마음의 평화에 이르는 일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시인은 아직 “내 울음소리”를 듣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언제쯤 내 울음소리를 내가 듣게 되겠느냐”고 간곡한 질문을 한다. 그래서 아직 괴롭다. 그리고 끝내는 “내 울음소리”를 듣기 위해 숲속과 바닷가를 오가며 자신을 비워간다.

 

현대인들은 내면의 악마와 사탄이 득실거리는 욕망의 늪에 빠져 산다. 그리고 치열한 자본주의적 경쟁 사회는 현대인들을 낮밤을 가리지 않고 욕망의 늪으로 끌어들인다. 현대인들이 빠진 욕망의 늪은 자본주의적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욕망의 사슬이다. 사람들은 자의든 타의든 그 사슬에 걸려 허우적거리며 또 스스로 그 욕망의 사슬을 잡고 욕망의 늪으로 빠진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정신질환을 많이 앓고 풍요 속에서 강한 자기소외를 경험한다. 그래서 대체로 외부 욕망 지향적이며 성찰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악순환된다.

 

이러한 현대인들이 욕망의 사슬을 벗고 욕망의 늪에서 빠져나와야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며 행복해질 수 있다. 이를 위해 비워야 한다. 비움의 노력을 통해 진정한 공(空)의 세계를 경험하는 일이며 공의 경지에 이르는 길이다. 그때 비로소 자기소외를 극복하고 진정한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면의 소리인 “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내 울음소리”를 듣는 일은 지난한 노력의 길이며 평생토록 하여야 하는 일이다. 동양의 성인 공자도 ‘내 울음소리’를 듣는 노력을 평생토록 하였다. 공자는 “나이 70이 되어서야 비로소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무리가 없다(종심소욕불유구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논어 위정편 4장)”고 하였다. 이 말은 나이 70이 되어서야 겨우 그 “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오늘 잠시 “내 울음소리”를 들었더라도 내일 또다시 욕망의 늪으로 빠질 수도 있다. 인간은 욕망 지향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또 나를 비우며 성찰하여야 한다. 그래서 “내 울음소리”를 듣는 일은 평생토록 반복적으로 하여야 하는 자기 정화의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은 일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매일매일 명상과 성찰의 시간을 가짐은 물론 자기 비움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휴가철이 다가온다. 많은 사람이 휴가를 다녀올 것이다. 휴가를 다녀오지 않더라도 잠시 잠시 자기의 몸과 마음에 휴가를 주어야 할 것이다. 휴가는 매우 중요하다. 현대인들에게 쉰다는 것은 즐기고 낭만을 찾고 먹고 마시는 것만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톱니바퀴처럼 조밀하게 짜여진 조직과 자본주의적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욕망의 사슬로부터 잠시 벗어나는 일이다. 자기 마음과 영혼, 몸에게 휴식을 주는 일이다. 욕망으로부터 해방을 경험하게 하는 일이다. 그 해방은 몸과 마음이 공(空)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일이다.

 

따라서 다가오는 휴가 때는 시에서 시인이 숲속과 바닷가를 오가며 새소리와 해조음 소리를 들으며 멍때리기의 시간을 가졌던 것처럼, 명상할 수 있는 책 한 권 옆에 끼고, 숲속과 바닷가에서 새소리와 해조음 소리를 들으며 그 공(空)의 세계를 경험하기 위한 멍때리기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참 좋으리라. 그러면 분명 ‘마음의 소리’ ‘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곧 자기소외를 극복하고 참된 나를 찾는 작은 초석을 놓는 길이 될 것이다. 올여름 휴가는 나를 찾아 떠나는, ‘내 울음소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되었으면 한다. 나도 그런 휴가를 떠나고 싶다. 우리는 언제 가야 《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 시인 조오현(1932~2018)에 대하여***

조오현은 1932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939년에 입산하여 1968년에 석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지가 되었다. 1968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하였으며 1977년 설악산 신흥사 주지가 되었다. 1997년에 만해상을 제정하는데 주도하였으며, 1998년에는 백담사 무금선원 설립하였다. 2011년 신흥사 조실에 추대되었고, 2013년 강원 인제군 만해마을을 동국대에 기증하였다. 2015년 조계종 원로의원이 되었고, 정지용문학상, 공초문학상, 한국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2018년 5월 27일 입적하였다. 시집에는 『심우도』(1979) 『절간이야기』(2003) 『아득한 성자』(2007) 『마음 하나』(2012) 등이 있다. 그의 시에는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한 인간과 인간사에 대한 솔직한 물음과 느낌이 꾸밈없는 언어 속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녹아 있으며, 선적 세계와 깨달음보다는 일상의 평범함에서 더 높고 환한 빛을 보는 소박한 시 정서가 진실의 잔잔한 빛을 발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마침내 달이 기울면서 자기 그림자를 거두어 가고 관음지에 흐릿한 안개비가 풀어져 내리자 사내는 늙은이처럼 시시부지 일어나며 ‘그것참..... 물 속에 잠긴 달은 바라볼 수는 있어도 끝내 건져낼 수는 없는 노릇이구먼......’ 하고 수척한 얼굴을 문지르며 흐느적흐느적 산문 밖으로 걸어 나가는 것을 다음 날 새벽녘에 보았지요.” -조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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