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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백남채 손녀 백혜선 홍보대사로 위촉

한광수 기자 | 입력 : 2025/01/07 [09:16]

▲ 독립기념관, 백남채 손녀 백혜선 홍보대사로 위촉     ©

  

[뉴스파고=한광수 기자] 독립기념관(관장 김형석)은 1월 6일 겨레누리관에서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백남채(1990, 애족장) 독립운동가의 손녀인 백혜선씨를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독립기념관 관람 활성화를 위해 올해 12월 31일까지 활동하게 될 교수이자 피아니스트인 백혜선 홍보대사는 미국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학·석사를졸업 후 현재 대구 카톨릭대학교 석좌교수와 미국 보스톤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주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홍보대사로서 광복 80주년 관련 행사 참석 및 독립기념관 주요사업 협업을 통해 홍보를 추진할 예정이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은 이번 홍보대사 운영을 통해 광복 8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의 정신을 기억하며, 독립기념관의 메시지가 널리 퍼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편 백남채는 1919년 2월 15일 중국 상하이 신한청년단에서 특파된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가 백남채를 방문한데 이어 2월 24일에는 세브란스병원 사무원이자 대구·경북 지역 독립선언서 배포 책임자인 이갑성()이 방문하여 국내외 정세를 알려주며 대구에서도 궐기할 것을 권유하였다. 곧이어 세브란스 전문의학생 이굉상()이 독립선언문 200매를 가지고 와 이만집 목사에게 전달하였다. 독립선언문이 도착하자 1919년 3월 6일 백남채를 필두로 이만집·김태련, 계성학교 학감()이자 신정교회 장로인 김영서(), 동료 교사 최경학()·최상원()·권희윤() 등이 상의하여 대구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어 백남채는 이만집·김태련·김영서·권희윤·정재순()·정광순()·최상원·최경학 등과 함께 대구 큰장[서문시장] 장날인 3월 8일 오후 1시에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각자 주민과 학생 동원에 대한 책임을 분담하였다. 백남채는 계성학교 학생 동원을 담당하였으며, 대구고보()·신명여학교()·성경학교() 학생들에게도 연락하여 연합 시위를 전개하도록 주선하였다. 1919년 3월 6일 김태련 등은 이굉상이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크고 작은 태극기 40여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백남채는 계성학교에서 준비된 독립선언문을 학교 소사에게 맡겨놓았다가, 학생들을 통해 3월 8일 당일 군중들에게 배포하도록 지시했다.


백남채는 독립만세시위 결정일 하루 전인 3월 7일 일본 경찰의 예비 검속으로 체포되었다. 그렇지만 독립만세 시위운동은 예정대로 추진되었다. 큰장에 집결한 1,000여 명의 군중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종로와 동성로를 거쳐 달성군청 앞까지 행진하였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 군경의 탄압으로 많은 부상자가 생기면서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사전 예비 검속된 백남채는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겪고 1920년 7월 출감하였다. 그 후 베이징으로 가서 사원 30명 규모의 벽돌공장인 조선연와회사()를 운영하면서, 그 이윤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조달하고, 모교인 계성학교 재정으로 지원하였다. 1922년에는 대구 청년운동의 중심지인 조양회관() 건립에도 직접 참여하였다. 또한 1926년 희도보통학교()[대구종로초등학교]를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백남채는 1927년부터 1930년까지 ‘대구학교 평의회’ 의원이 되어 일제의 교육 정책에 타협하였고, 1936년에는 일제의 식민지배 말단기구인 남산정2구 총대를 역임하는 등 일제 식민지배에 편승하기도 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후 일제가 황국신민화정책의 일환으로 기독교대구연합회를 결성하자 일본인 위원장·부위원장을 도와 재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종교보국사상을 고취시키는 업무도 담당하였다.

1945년 광복 직후 경북치안유지회장, 경북도내무부장을 지낸 뒤, 1946년 이후 본격적인 정치활동에 참여하였다. 1947년 미군정 아래 과도입법위원, 1948년 5월 10일 한민당 소속 제헌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50년 민주국민당 후보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였고,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대구로 피난해 있던 중 1951년 10월 2일 폐암으로 생을 마감하였다.[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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