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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우리는 모두 《하늘》 이 되고 싶다

이상호 천안아산경실련 대표 | 입력 : 2021/09/17 [11:04]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대표] 추석이 다가온다. 올해 추석엔 파란 하늘과 한가위 달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코로나 19로 우울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었으면 좋겠다. 하늘과 달은 인간의 역사 이래 우리에게 꿈과 희망과 동경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고강도 거리 두기에 벼랑 끝으로 내몰린 자영업자 5,000여 명이 전국적으로 차량 시위를 했다. 그들에게 정부와 중대본은 하늘이다. 생존의 목줄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보도에 의하면(동아일보 2021. 9. 13) “취준생 57%가 추석에 단기 알바를 하고자 나섰지만 알바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란다. 힘겹게 살아가는 취준생들 상당수는 추석에도 집에 가지 못한다. 뭔가라도 해서 벌어야 한다. 그런데 알바 자리도 없으니 어찌하랴. 그들에게 알바 자리는 추석날 파란 하늘보다 소중하다. 

 

카카오 등 거대 플랫폼 기업들이 골목 상권까지 넘보며 온갖 갑질을 자행한다고 난리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이미 예측되었던 일이다. 이제 상당수의 관련된 중소기업 및 자영업자들에게 거대 플랫폼 기업은 목줄을 쥐고 있는 하늘이 되었다. 

 

이런 위협적인 하늘은 문명이 진화하고 노동문화가 개선되면 사라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여 약자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추석을 맞이하면서 모두가 파란 하늘과 한가위 달을 보았으면 하는 소망으로 박노해의 시 《하늘》을 읽는다.

 

 하   늘 

    박노해(1957〜 )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손을 붙일 수도 병신을 만들수도 있는 의사 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두 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가 경찰서에 끌려가 

세상에 죄 한 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소에 집어 넌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죄인을 만들 수도 살릴수도 있는 판검사님은 

무서운 하늘이다 

 

관청에 앉아서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관리들은 

겁나는 하늘이다

  

높은 사람, 힘 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은 

모두 하늘처럼 뵌다 

아니,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이시다 

 

나는 어디서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대대로 바닥으로 살아온 힘없는 내가 

그 사람에게만은 

이제 막 아장걸음마 시작하는 

미치게 예쁜 우리 아가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하늘이겠지 

 

아 우리도 하늘이 되고 싶다 

짓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서로를 받쳐주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박노해 『노동의 새벽』 느린 걸음, 2015- 

 

박노해는 척박한 노동 환경 속에서 인간다운 삶을 꿈꾸었던 시인이다. 이 시는 박노해의 유명한 시집 『노동의 새벽』 제1장 “사랑이여 모진 생명이여” 의 맨 앞에 실린 시이다. 이 시는 사랑을 위하여 모진 생명의 극복을 갈구하는 시인의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박노해를 욕망의 시인이라고 여겼었다.

 

시는 총 8연으로 구성되었다. 시에 등장하는 ‘하늘’은 우리 삶이 겪는 온갖 고단함과 소망을 담고 있다, 제1연에서 제6연까지의 하늘은 삶과 자유, 행복을 짓누르는 무서운 하늘이다. 7연과 8연의 하늘은 시인이 꿈꾸는 세상, 모두가 바라는 행복의 하늘이다. 그래서 전반부의 하늘과 후반부의 하늘은 같은 언어지만 다른 하늘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것 세 가지를 전통적으로 의식주(衣食住)라고 했다. 그러나 현실성 있게 말하면 식의주(食衣住)다. 사람이 생존하는데 최우선은 먹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입지 않고는 살 수 있어도 먹지 않고는 절대 살지 못한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의 가장 우선적인 생존 법칙이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존 문제의 기본적인 세 가지를 의-식-주의 순서로 말한 것은 아마 형식과 체면 문화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세 가지의 순서를 식-의-주로 바뀌어야 한다고 여긴다. 

 

제1연은 바로 그 먹는 문제를 말하고 있다. 밥줄은 먹는 문제이며 가장 소중한 생명줄이다. 그 밥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 바로 사장님이다. 사장님은 밥줄, 그 밥을 구할 수 있는 돈줄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빅토르 마리 위고(Victor-Marie Hugo1802〜1885)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이 배고픈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것도 밥줄 때문이다. 생명줄인 밥줄 즉 돈줄을 얻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인간에게는 일할 의무가 있다. 일할 의무는 생존을 위해 신이 부여한 무상의 명령이다. 어떤 식으로든 일을 하여야 그 밥줄을 챙기고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적 동물인 인간사회에서는 일할 권리도 있다. 일할 권리 또한 신이 부여한 무상의 명령이다. 일할 의무는 있는데 권리가 없으면 일을 할 수 없고 결국 밥줄을 획득하지 못하여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런데 산업사회에서 가진 것이 없는 노동자에게 그 일할 권리를 인정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가진 자인 사장님이기 때문에 사장님은 밥줄이다. 여기에는 상당한 계급성이 드러난다. 그 계급성을 부르주아지(bourgeoisie)와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라는 용어로 규정 지을 필요는 없다. 다만 일할 권리와 의무가 있지만 일을 할 수 있는 토지와 재화를 가지지 못한 자는 그것을 가진 자(사장님)에게 일을 제공하여 그 대가로 밥줄을 챙겨야 한다. 그러니 사장님은 하늘일 수밖에 없다. 

 

제2연은 생명 치유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 삶의 현장에는 늘 생존의 위협이 도사리게 마련이다. 생존을 위해, 다시 말해서 일할 권리와 의무의 이행을 위해 노동을 하다 보면 다칠 수도 있고 병들 수도 있다. 이때 그것을 치유하는 사람은 바로 의사 선생님이다. 여기서 의사 선생님은 사장님처럼 치유의 재화를 가졌고 나는 그것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런 점에서 의사 선생님과 나는 유산자와 무산자로 나뉘어 진다. 여기에도 역시 돈줄이 필요하다. 돈이 없으면 의사는 치료를 거절할 수 있다. 손을 다친 자, 병든 자는 의사 선생님의 치료 행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순전히 의사 선생님의 의술과 인간적인 양심에 달려 있다. 만약 의사 선생님이 의술을 가졌다 하더라도 돈이 없다고 치료를 거절하면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다. 반대로 돈이 있더라도 의술이 부족하면 어찌할 수 없다. 그래서 “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그 손을 붙일 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 선생님은 나의 하늘”이 된다. 

 

제3연은 사회적인 계약과 자유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 모든 민주사회는 계약관계에 의해 유지되고 발전된다. 사장과 직원 간에도 노동과 임금이란 매개를 통해 계약이 이루어져 있다. 노동을 제공하면 반드시 임금을 주어야 한다. 두 달째 임금이 막혔다는 것은 사장의 계약위반이다. 그러니 노동자들은 사장에게 임금을 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런 권리가 노동자에게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노조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았으므로 불법이라 하여 경찰서에 끌려갔다. 그들은 정당한 요구를 하였지만, 현실을 짓누르는 법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현행법 집행에 충실한 경찰관은 도둑질이나 강도질 혹은 살인 같은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은 그들의 행위를 법률위반으로 감옥소에 넣는다고 위협한다. 김옥소에 들어가면 자유를 박탈당한다. 그러니 경찰관은 나를 감옥소에 넣을 수도, 넣지 않을 수도 있는 즉, 자유권을 쥐고 있는 항시 두려운 하늘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도 경찰관은 그 재화(권력)를 가진 자이며 노동자는 그것을 가지지 못한 자이다.

 

제4연은 제3연의 연장선에 있다. 모든 인간은 양인(良人자유인)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 물론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실정법과 그 집행관들은 사람들을 양인으로 만들 수도 있고 죄인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 바로 판검사님이다. 경찰관이 죄를 지었다고 판단하여 검사에게 송치하면 검사는 판단에 따라 기소를 하고 구형을 하여 재판을 받게 한다. 판사는 그 내용을 검토하여 판결을 내린다. 여기서 판검사의 인간적인 양심과 법적 판단은 나를 죄인으로 만들 수도 있고, 양인으로 만들 수도 있다. 만약 판검사가 죄인으로 판정을 내리면 나는 양인으로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다. 그러니 무서운 하늘이다. 장발장은 굶주린 조카를 위해 한 조각의 빵을 훔친 죄로 19년 동안 형무소에서 지내다가 46세에 겨우 석방되었다. 그는 선량한 삶을 살고자 했으나 그를 집요하게 쫓는 자베르에 의해 늘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는 결국 평생 죄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복비(腹誹)라는 말이 있다. 복비(腹誹)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마음속으로 꾸짖거나 비판하는 것’을 일컫는다. 정치적으로 반대파나 못마땅한 사람을 척결하는데, 겉으로 뚜렷한 잘못이 드러나지 않지만, 속으로 흑심을 품었거나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죄를 묻는 경우이다. 

 

한무제 때 장탕(張湯)이 고심한 끝에 ‘백록피폐(白鹿皮弊)’라는 돈을 제조했다. 이때 대사농(大司農) 안이(顔異)가 그 돈이 실제의 가치보다 함량이 떨어진다며 장탕을 못마땅해했다. 이 일을 안 한무제 또한 장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장탕은 이에 앙심을 품고 안이에게 보복을 결심했다. 어느 날 안이가 다른 대신들과 한담 중에 다른 대신이 황제가 내린 칙서가 적당하지 못하다고 했다. 이때 안이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고 반박을 했지만, 장탕은 이를 빌미로 ‘안이가 겉으로는 황제의 칙서가 잘못이 없다고 했지만, 내심으로는 다른 사람과 같으며, 겉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황제의 칙서에 반대한 죄가 크니 죽어 마땅하다’고 황제에게 안이를 척살하도록 간했다. 한무제는 장탕의 말을 듣고 안이가 자신의 적폐라 여기고 척살했다.

 

[좌전]에 ‘한 사람을 척결하는데 이유가 없어 근심할 일은 없다. 예로부터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고자 한다면 그에 합당은 이유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했다. 가끔은 죄가 없거나 크지 않은 사람을 온갖 이유를 동원해 중죄인으로 다스리는 경우가 있다. 겉으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죄일지라도 복비로 다스리면 죄가 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 복비에 비추어 보면, 권위주의 정권의 시절에는 억울하게 죄인이 된 경우가 허다했다. 그리고 경찰관과 판검사의 편의주의적 발상과 정치적 편향으로 인해 죄인이 된 사람들도 많았음을 간과할 수 없다. 시인이 그들을 무서운 하늘이라 한 이유를 알겠다. “법률과 관습이 있기 때문에 사회적인 처벌이 생기고, 그로 인해 문명 한가운데 인공적인 지옥이 생겨나며, 신이 만들어야 할 숙명이 인간이 만든 운명 때문에 헝클어지고 있다”는 빅토로 위고의 말이 되새겨진다.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악은 늘 진행형이다. 그것이 정치적일 때 더욱 불공정하고 처참해진다. 

 

제5연은 행정권의 문제이다. 행정권은 인간의 삶의 제반 면모를 관장하는 일이다. 이 행정권에 따라 혜택의 유무가 달라진다. 지금은 공무원들이 옛날처럼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지만, 그때는 달랐다. 그들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인허가도 나고 각종 사업도 결정된다. 그러니 그들의 행위는 나라를 흥하게도 할 수 있고 망하게도 할 수 있으며 직장을 흥하게도 할 수 있고 망하게도 할 수 있었다. 적어도 1980년대까지는 그랬다. 

 

제6연은 제1연부터 5연까지의 종합이다. “높은 사람, 힘 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은 한마디로 재화(꼭 돈만 지칭하는 것이 아님)를 많이 가진 자이다. 그러니 그들은 모두 하늘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총체적으로 우리(노동자, 무산자, 하층민)의 생명줄(돈줄, 자유 등)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이다. 지금까지의 하늘은 화자에게 저승사자와 같은 무서운 하늘이다. 화자는 그 하늘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다. 그리고 화자 스스로 하늘이 되고 싶다.

 

제7연에서 화자는 하늘이 되고 싶은 자신을 돌아본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대대로 바닥으로 살아 온 힘없는 내가” 하늘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절망 속의 화자는 적어도 “이제 막 아장걸음마 시작하는 미치게 예쁜 우리 아가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하늘이겠지”라고 상상한다. 화자는 한 집안의 남편이요 아버지인 가장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힘 있는 하늘에 짓눌려 생존을 위해 악전고투하지만, 집안사람들 특히 미치도록 예쁜 아가에게만은 작고 흔들리지만, 하늘이고 싶다. 그것은 가장으로서의 사명이다. 여기서 하늘은 빛과 책무와 희망에 대한 갈망이다. 

 

제8연에서 화자의 소망은 세상으로 향한다. 주체도 “나”에서 “우리”로 이동한다. “나”는 한 개인이지만 “우리”는 공동체이다. 그 공동체는 특정의 계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숨 쉬고 사는 세상 모든 사람일 것이다. 거기에는 사장님도, 의사 선생님도, 경찰관님도 판검사님도 포함될 것이다. 화자는 “아 우리도 하늘이고 싶다”고 소리친다. 화자가 꿈꾸는 하늘은 앞에서 말한 타인의 삶을 짓누르는 하늘, 타인의 삶을 구속하는 하늘, 타인의 생명줄을 움켜쥔 하늘이 아니다. “서로를 받쳐주는 하늘”이다. 서로를 받쳐주는 하늘은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세상이다. 삶의 모든 공동체가 서로 존중하며 배려하는 세상이다. 

 

이 시를 계급적 측면으로 보면 제1연에서 제6연까지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계급성을 드러낸다. 여기까지 화자인 나는 못 가진 자에 속한다. 그러나 7연과 8연에서 화자가 꿈꾸는 우리는 그 계급성을 초월한다. 여기서 화자도 계급성을 초월하는 소망을 가진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적으로 계급적인 현실사회(무서운 하늘)에서 계급을 초월하여 모두가 존중하는 미래 세상(서로를 받쳐주는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세상-무계급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이 시를 계급적 측면으로만 이해하면 시를 망친다.

 

그런데 모두가 하늘인 세상, 그런 세상이 있을까? 올 수나 있을까? 그것은 유토피아가 아닐까?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가 꿈꾸었던 『유토피아』를 그려본다. 모어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최우선으로 하는 나라이며, 최소한의 권력과 통제로 유지된다. 모두 열심히 일하여 물자는 풍족하지만, 사유재산은 축적하지 않고 공평하게 나눈다. 남녀 가릴 것 없이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고, 공공의 도덕을 함께 중시하며 종교의 자유와 쾌락도 추구할 수 있다. 특히, 재물이나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은 하지 않는다. 이런 나라가 있을까? 이런 나라는 그도 없다고 했다. 그가 말한 유토피아(Utopia)는 그리스어로 ‘없다’는 의미의 ‘ou’와 장소를 뜻하는 ‘topos’가 합해진 말로 “어디에도 없는 곳”을 의미한다. 그가 꿈꾼 유토피아는 완벽한 사회지만 실현할 수 없는 사회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사회를 지향해야 함을 묵시적으로 역설한다. 

 

시인이 이 시를 쓰고 세상을 향해 절규하였던 때가 1984년이다. 지금은 그로부터 35년 이상 지났다. 그러나 이 시점에도 형태는 달라졌지만 무서운 하늘은 늘 존재한다. 골목상권까지 잠식하는 거대 기업은 소상공인에게 무서운 하늘이다. 경기가 좋지 않다고 추석 상여금, 아니 임금조차 제대로 주지 않는 기업은 검은 하늘이거나 측은한 하늘이다.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주인은 하늘이다. 천정부지로 뛰는 집값과 금융기관은 집 없는 서민에게 겁나는 하늘이다.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동아일보 2021.9.15) 5월 중순 3년 이상 장기 미취업 상태인 청년(15세〜29세)은 27만 8,000명이다. 거기다가 3년 이상 취업도 하지 않고 구직활동도 하지 않는 니트족이 10만 명에 육박했다. 넘쳐나는 청년실업과 취준생들, 취포자(취업 포기자)들에게 정부와 기업은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하늘이다. 그뿐이랴. 힘을 엄청나게 키운 노조가 횡포를 부려 갑질하는 것도 무서운 하늘이다. 그런데 이를 방관하고 속수무책인 정부와 정치인은 무심한 하늘이다. 특히 코로나 19대책으로 영업정지와 단축 영업을 계속 강행하는 정부와 중대본은 자영업자들에게 정말 무서운 하늘이다. 문명이 진화되고 사회가 발전한다고 하지만 무서운 하늘은 늘 새로 탄생하고 진화해 가고 있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천사 지향성과 악마성이 동시에 있다. 천사 지향성은 선하고 착한 사람, 사람들을 존중하고 베풀며 어울리고 싶은 천사와 같은 성향이다. 그것은 따뜻한 인간애와 욕망의 절제가 일반화된 사회에서 가능하게 발휘된다. 그러나 욕망이 비틀어지고 절제가 상실되어 자본과 권력과 성적 욕망의 노예가 되면 악마성이 발휘되어 인간이 인간에게 악을 행하게 된다. 그런데 세상은 늘 자본과 권력과 성적 욕망을 부채질한다. 그래서 악은 늘 재생산된다. 자본과 권력의 힘으로 횡포를 부리는 사람과 집단은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늘 무서운 하늘이 된다. 그래서 인간다운 사회를 위해선 인간애가 배양되어 개인이 욕망의 절제를 이룰 수 있어야 하며 그런 분위기의 사회를 만들어 가는 정치적 노력이 절대 필요하다. 

 

그래도 추석을 맞이하면서 무서운 하늘들이 제발 사라지기를 소망해 본다. 추석날 낮에는 파란 하늘, 밤에는 보름달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기를 소망한다. 세상 모든 사람이 무서운 하늘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하늘이 되기를 둥근 달에 소망하기를 바란다. 사람들의 마음에 천사 지향성이 보름달처럼 솟아오르길 소망해 본다. 정말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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