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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호동 왕자를 사랑한 낙랑공주의 비극

이상호 | 입력 : 2021/10/26 [09:42]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대표] 김부식의 『삼국사기』(「고구려 본기」대부신왕 15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대무신왕 15년(서기 32년) 4월에 고구려 왕자 호동이 옥저 지장을 유람할 때 낙랑왕 최리가 호동 왕자의 풍모를 보고 반하여 말했다.

 

“내 그대를 보니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다. 혹여 북국의 신왕 아들이 아닌가?” 

 

최리는 호동을 궁으로 데리고 가 딸 낙랑공주를 주어 사위로 삼았다. 낙랑공주는 호동의 사내다움과 사랑에 빠졌다. 시간이 지나자 호동은 일이 정리되는 대로 데려가겠다고 말하고 낙랑공주를 남겨두고 고구려로 돌아갔다. 호동은 낙랑공주에게 밀사를 보내 무기고에 있는 북과 나팔을 모두 부수면 바로 달려가 아내로 데려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내로 맞을 수 없다고 했다. 낙랑의 북과 나팔은 적이 오면 위험을 알리고 군사를 집결시키는 중요한 무기였다.

 

낙랑공주는 호동의 말에 따라 북과 나팔을 모두 부수고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호동에게 알리며 자기를 데려가라고 간청했다. 호동은 즉시 부왕 대무신왕에게 이 사실을 알려 낙랑을 기습 공격하라고 조언했다. 고구려 대무신왕은 즉시 낙랑을 급습했다. 최리는 북과 나팔을 모두 부순 것이 딸의 소행임을 알고 딸을 죽이고 항전하다가 결국 고구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당시 낙랑은 고구려가 상대하기에 버거운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이 호동 왕자와 낙랑공주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문학적 소재가 되어 새로운 이야기로 파생되어왔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나라 간의 첩자(간첩) 이야기로 보면 문학과 사랑을 넘어 매우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된다.

 

어쨌든 낙랑은 고구려에 의해 멸망하고 복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를 첩자로 활용했다는 것은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호동은 사랑을 미끼로 낙랑 공주를 첩자로 이용했고, 낙랑 공주는 사랑에 눈이 멀어 적국의 첩자가 되었다. 그리고 낙랑왕 최리는 고구려의 야심을 의심하지 않았으며, 호동 왕자의 풍모에 반해 사위로 삼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으면 끝까지 믿으려 하는 심리적인 현상이 있다. 이런 현상은 특히 권력이 크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강하다고 한다. 정치적 목적이나 이념이 권력자의 눈을 가릴 때 적국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리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으며 그의 그런 잘못된 믿음은 결국 자기의 파멸을 초래하게 했다. 

 

국가간의 관계는 우호국이건 적대국이건 서로 간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한 정보수집과 첩보 활동은 필수적이다. 그 첩보 활동을 어떻게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존망이 결정되기도 한다. 그래서 손자도 『손자병법』에서 「용간」 즉 간첩의 활용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래서 『손자병법』의 마지막 편인 제13편 「용간」은 첩자의 의미, 종류, 중요성, 활용사례 등을 자세하게 다룬다. 

 

첩자의 활용은 적대국은 방어와 공격에 활용하기 위함이고 우호국은 동맹과 안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예나 지금이나 첩자는 항상 운용되며 현대 국가는 나라마다 정보기관을 공식기구로 두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군사와 안보를 넘어 경제와 기술 안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나아가 첩자들의 활동이 정보수집이란 단순 활동을 넘어 상대국의 민심을 교란하고 통치자들의 눈과 귀를 흐리게 하는 역할도 한다는 것은 익히 아는 바이다. 그래서 내 주변에 첩자가 없는지를 살펴야 하며 특히 국가 통치자들은 국가통치기구 안에 첩자들이 없는지도 눈여겨 살펴야 한다.

 

영국 BBC는 10월 11일 ‘북한이 남파한 간첩이 1990년대 초 5, 6년간 청와대에 잠입해 근무했다는 북한군 대남공작기구 고위 장교 출신 탈북자의 증언이 나왔다’고 전했다. BBC가 인터뷰한 사람은 김국성(가명·사진) 씨로, 북한 첩보 기관에서 30년간 일하다가 2014년 탈북해 지금은 국가정보원 산하기관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는 북한 정찰총국에서 5년간 대좌(대령)로 근무했으며 2010년 3월과 11월 잇따라 발생한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도 “정찰총국 일정한 간부들 속에서는 비밀이 아니고 통상적인 자랑으로, 긍지로 알고 있는 문제”인데 김 위원장의 지시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김 씨는 1990년대 초‘북한에서 직파한 공작원들이 청와대에서 5, 6년간 근무하고 무사히 북한으로 복귀해 조선노동당 314연락소에서 근무했다’고도 했다. 이 시기는 노태우 대통령(1988∼1993년)이나 김영삼 대통령(1993∼1998년) 재임기에 해당 된다. BBC는 김 씨 주장의 사실 여부를 검증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신원은 확인했다고 밝혔다. 정부는 김 씨가 정찰총국 대좌 출신인 것은 맞다는 입장이지만, 국가정보원은 “1990년대 초 남파 공작원들이 청와대에서 5, 6년 근무했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이라고 했다. 김씨는 2013년 북한의 실세 장성택의 처형을 보고 너무나 경악하여 ‘내가 더 이상 북한에서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로구나’ 하고 신변의 위험을 느껴 탈북했다고 했다.(동아일보 2021. 10.12) 

 

노태우 대통령 때는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하던 때이며, 김영삼 대통령 때는 북한과의 정상회담을 제안하며 가능성을 열었을 때였다. 그러나 대북 경계심은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청와대에 간첩이 근무했다는 것은 경악이다. 사실 파악과 대비는 매우 중요하다.

 

지금도 북한 공작원이 우리 내부에 침투하여 간첩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의심의 보도는 간혹 나오고 있으나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탈북자의 간첩 활동 이야기도 간혹 흘러나오고 있다. 국정원이 발표한 청주 간첩단(충북동지회) 사건은 한동안 시끄럽다가 대선 국면에 밀려 수면으로 가라앉았다. 그들은 60여 명으로 지난 대선 때 특보 활동까지 했으며, 계속 북한 김정은의 지령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국민도 그 문제에 그리 민감하지 않으며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 기관에서도 별말이 없다. 모두 둔감해진 것일까? 믿고 싶은 것만 믿기 때문일까? 별것 아니라고 보기 때문일까? 남북 화해의 정치 분위기에서 북한을 믿기 때문일까?

 

낙랑왕 최리가 고구려의 야심을 간파하지 못한 것도 낙랑공주가 호동 왕자의 사랑에 빠진 것도 믿고싶은 것만 믿고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아무리 북한과 대화와 화해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변하지 않는 북한을 경계하여야 하며 그들이 보냈거나 우리 내부에 육성한 간첩을 살펴야 한다. 그것이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고 나라의 안위를 지키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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